우리의 의식을 풍부하게 하거나 생명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책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를 용이하고 천박하며 일시적 위안을 주는 세계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다루는 일은 서평가의 몫이지 명상하고 재창조하는 비평가의 기술이 관여할 바는 아니다. “명작 100선” 아니 천 권 이상의 명작이 있다. 그러나 그 숫자가 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평가나 문학사가와는 달리, 비평가는 걸작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일차적 기능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일이 아니라 좋은 것과 최상의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
구비평은 경탄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가끔 텍스트에서 물러나 도덕적 목적을 살피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문학을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힘의 작용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무엇보다 구비평은 그 범위와 성격이 철학적이다. 이 생각을 일반화하면 사르트르가 포크너론에서 토로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즉 “소설의 기법은 항상 소설가의 형이상학으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에는 사상의 신화 체계가 모여 있으며, 무질서한 경험에 질서와 해석을 부여하려는 인간 영혼의 영웅적인 노력이 결집되어 있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의 개화는 서구 문학사의 3대 승리기 중의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머지 둘은 아테네의 희곡 작가 및 플라톤 시대와 셰익스피어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세 시기에 서구 정신은 시적 직관에 의해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고, 또한 인간 본성이 갖고 있는 빛이 한꺼번에 응집되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창작 이외에도 정치 이론, 신학, 역사 연구에도 개입했는데, 이 외도는 천재의 괴벽스러운 취미라거나 위대한 정신이 흔히 물려받는 기이한 맹목성의 본보기쯤으로 간과되기 일쑤다.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된 경우에도 철학은 철학대로 소설은 소설대로였다. 그러나 원숙한 예술에서 기법과 형이상학은 종합체의 앙면이다. 단테와 마찬가지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있어 시와 형이상학, 즉 창조에의 충동과 체계적 인식에의 충동은 경험의 압력에 번갈아서 반응했는데, 이 양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서구와 러시아의 19세기 소설이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발자크, 디킨스, 플로베르의 전통은 세속적이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은 종교적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경험이 속속들이 밴 풍토와 러시아가 임박한 종말에서 탁월한 역할을 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스킬로스나 밀턴에 못지않게 그들의 천재가 살아 있는 신의 손에 맡겨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키르케고르가 그러했듯이 인간의 운명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였다.
톨스토이는 교훈주의가 다른 어느 것보다 앞서야 한다는 신념하에 자신의 소설들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기타 위대한 중편들이 여전히 당당하게 건재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명백히 도덕에 치중한 자신의 연극에서 위안을 찾고, 셰익스피어가 희곡의 올바른 기능을 왜곡하고 배신했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도덕성과 “삶의 지침”을 주는 일이 왜 유독 극작가의 책무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톨스토이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일관된 원칙을 부여하려는, 자신이 늘 한 마리의 고슴도치였음을 주장하려는 고집스러운 노력에 그야말로 엄청난 판돈을 걸었던 것이다.
19세기가 숭고함과 일관성에 있어 고전 및 르네상스 희곡에 비할 만한 비극 형식을 창조하려 한 꿈은 바로 음악에서 이루어졌다. 베토벤 4중주의 엄숙함과 비탄, 슈베르트의 C장조 5중주, 베르디의 [오텔로], 그리고 무엇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완벽하게 이룩된 것이다. 시적 비극을 “부활시키려는” 위대한 야망은 낭만주의 운동을 사로잡았지만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입센, 체호프와 더불어 연극이 다시 활기를 찾자, 그 영웅주의의 낡은 양식은 회복할 수 없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19세기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인물 속에서 위대한 비극의 대가를 배출해냈다. 연대를 따라 『리어 왕』과 『페드르』에서부터 앞으로 나가가던 우리의 정신은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자, 아니 오직 이때서야 갑작스럽게 깨달은 듯 멈추어 선다. 브야체슬라프 이바노프가 결정적인 이미지를 찾던 끝에 말했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셰익스피어”이다.
즉 도스토예프스키에 필적할 만한 규모를 가진 어떤 소설가보다도, 그의 감수성, 상상력의 양식, 언어 사용법 등은 희곡에 접맥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희곡의 관계는 그 중심성에서 보나 영향에서 보나 톨스토이와 서사시의 관계와 유사하다. 이것이 그 특유의 천재성을 톨스토이의 천재성과 비교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특징짓는다. 그는 마치 디킨스처럼 글을 쓰면서 등장인물들의 몸짓을 따라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희곡 작가적인 기질이 밖으로 드러나는 몸짓이었다.
『오레스테이아』, 『오이디푸스』, 『햄릿』, 『맥베스』를 보면 명백하듯이, 살인과 비극 형식은 예로부터 서로 부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인류학자들이 말해왔다시피, 희곡의 기원 자체에 희생제의에 대한 희미하지만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스며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살인에서 징벌로의 진자 운동은 무질서한 행위에서 화해와 균형 상태로 나아가는 것, 바로 우리의 비극에 대한 생각들을 바로 연상시키는 그런 진전을 독특하게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살인은 프라이버시를 종결시킨다. 다시 말해 암살자의 집에서는 문이 언제라도 열어젖혀질 수 있다. 그에게는 벽이 셋뿐인데, 이는 곧 그가 “무대 위에서” 살고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극작가의 관점에서 시간을 인식했다. 그는 『죄와 벌』을 위한 메모에서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일련의 숫자다. 시간은 존재자가 비존재자와 가지는 관계이다.” 얽혀 있는 무수한 행동을 최소한의 시간 속에 집중시켜 근사하게 조화시키는 일이란 그에게는 하나의 본능이었다. 이 집중은 악몽의 느낌을 자아낸다. 즉 완화해주고 지연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해버린 후의 언어와 몸짓이 주는 느낌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랫동안 어떤 식으로 『백치』를 끝맺을 것인가 고심했다. 어떤 구상에서는 나스타샤가 미슈킨과 결혼하며, 다른 구상에서는 그녀가 결혼 초야(初夜)에 매음굴로 달아나 버리는가 하면, 세 번째 구상에서는 로고진과 결혼한다. 그러나 또 다른 변형을 보면 나스타샤가 아글라야의 친구가 되어 공작과의 결혼을 주선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심지어는 아글라야가 미슈킨의 정부가 될 가능성까지 고려해 본 흔적이 엿보인다. 이처럼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것 자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상력이 얼마나 심원하고 자유분방한지를 말해준다. 톨스토이가 마치 신이 인간을 다스리듯 전지전능하게 등장인물들을 가차 없이 다룬 데 비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진정한 극작가들이 그러하듯이 독립적이고 예견할 수 없는 행동의 역학에 내면의 귀를 기울인 듯하다.
『백치』의 메모를 보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모티프 및 테마는 늘 되풀이하여 나타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프루스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모두 『죄와 벌』이라고 제목 붙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구상되기로는 “백치”는 스타브로긴의 성질을 많이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비밀리에 결혼하고 공공연하게 모욕을 당한다는 점도 『악령』의 주인공과 빈틈없이 일치한다. 후기의 구상을 보아도 미슈킨이 “일단의” 아이들에 의해 받들어지고 있다. 이들은 플롯 전개상 중요한 역할을 하며, 미슈킨의 본성이 드러나게끔 해준다. 이것은 다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알료샤의 이야기가 된다. 질량 보존의 법칙은 자연뿐 아니라 창작의 시학에도 존재하는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자전적 경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과장되어서도 안 된다. 1869년 2월 스트라호프에게 쓴 편지에서 소설가는 단언한다. “내 나름의 예술관을 말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대개의 사람들이 환상적이고 보편성이 없다고 보는 것을, 나는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본질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의 환상적인 ‘백치’가 사실 가장 일상적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는 극단의 형이상학자였다.
톨스토이의 일생을 세 국면-문학 창작기와 그 시기를 전후한 철학 및 종교 활동을 벌인 수십 년?으로 구분하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톨스토이에 있어 두 개의 형성력을 분리할 수 없으니, 도덕가와 시인은 서로 근접하여 공존하면서 고통스러운 창조의 길을 열어 나갔다. 종교적 충동과 예술적 충동은 그의 온 경력을 통해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갈등을 벌였다. 이 갈등은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던 무렵에 가장 첨예했다. 그의 큼직한 영혼이 한순간에는 상상력의 삶으로 기우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입센이 지칭한 소위 “이상의 요구”에 굴복했다. 육체적 활동 그리고 육체 에너지를 난폭하게 발산하는 것만이 톨스토이에게 평온과 균형을 주었다는 인상을 우리는 받게 된다. 신체를 소모함으로써만 마음속에서 들끓는 저 논쟁을 잠시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이다.
1855년 3월, 톨스토이는 죽음의 순간까지 그를 지배하게 된 명백한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는 인류의 현 상태에 부합하는 새로운 종교를 건설한다는 “어마어마한 이상”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교이긴 하지만, 도그마 및 신비주의가 일소된, 미래의 지복(至福)을 약속하는 대신 지상에서의 지복을 주는 종교였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신조로서, 1880년 이후 집필-출판된 작품들은 이 신조에 옷을 입힌 데 불과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는 이미지와 상황,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언어 습관,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용어들, 행동의 성격들은 압도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종교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앙이냐 부정이냐의 위기에 처한 인물을 묘사했으며, 대개의 경우 부정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신의 등장을 가장 강력하게 목도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종교적 요소를 다루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새 그 주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톨스토이에게는 이런 단언이 적용되지 않는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는 역사적 사회적 소설의 선봉으로 읽을 수 있고 그 철학적-종교적 취지는 단지 어렴풋하게 인식될 뿐이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이 갈등은 묵시적인 폭력과 함께 터져 나왔다. 국가사회주의의 “천년” 제국(Reich)과 계급 없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국가?이것도 궁극적으로는 소멸되지만?가 오래전부터 추구되어 온 지복천년설의 종말론적 모습이자 새로운 목표가 된 것이다. 이 종말론은 신을 부정하는 데서 비롯되므로 세속적이다. 그러나 그 토대를 이루는 비전은 모든 지복천년적 유토피아 운동들의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여기 지상에서 좋은 삶을 창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둠의 양극 사이에서 무질서하고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때도 많은 여정 속에서 제 몫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신의 왕국은 인간의 왕국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의 신학이다. 이 신학이 과연 불완전하고도 분열된 반대자들을 물리칠 것인가는 이 괴로운 세기에 피할 수 없는 질문처럼 보인다. 다른 식으로 질문하자면, 인간 본성에 대한 더 진정한 상(像)과 역사에 대한 더 예언적인 설명을 제시한 사람이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라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천재는 예언자와 종교 개혁가의 그것이었지, 베르자예프가 생각하듯 전통적-전문적 의미에서의 신학자의 그것은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기존 교회의 의식과 성찬식을 경멸했고, 형식적이고 역사적으로 성화(聖化)된 양식으로 진행되어 온 신학의 논쟁들을 쓸데없는 궤변이라 생각했다. 그에게는 루소나 니체에서처럼 우상 파괴의 정신이 거세게 흘렀다. 따라서 그는 예술가이자 종교 교사로서 사회적 행위의 본질과 세상사를 위한 간명하고 합리적인 규범의 수립에 변함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를 “성스러운 계시도, 역사적 현상도 아니며,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가르침”이라고 간주하려 했다. 최근 한 비평가의 표현에 의하면 톨스토이는 “비합리적 면을 비운,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인 비전을 없앤, 은유와 상징을 박탈한, 기적과 때로는 기적의 우화까지 모조리 삭제한” 복음서를 만들었다. 그 결과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상을 지배하던 도상학(圖像學)에서 벗어나 종교적 소재를 다룰 수가 있었다.
한 심원하고 근본적인 철학이 상술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이념에 도취되고 언어의 불길에 소모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알레고리적 유형이나 화신personification이란 의미는 아니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보다 더 삶의 복합적 역동성을 완벽히 재현한 사람은 없다. 이는 여타 인간들이 애증을 먹고 산다면, 라스콜니코프, 미슈킨, 키릴로프, 베르실로프, 이반 카라마조프 같은 인물들은 사상을 먹고 산다는 말이다. 여타 인간들이 산소를 태운다면 그들은 사상을 태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