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2333년은 고조선의 건국 연도이기도 하지만 중국 요임금의 즉위 연도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고조선의 건국 연도를 전설상의 중국 요임금이 즉위했다는 연도에 인위적으로 끼워 맞춰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 왕권의 확립으로 인간은 국가라는 공동체에 완전히 귀속되었다. 왕권이 확립되기 전에는 사람들은 특정한 지역과 부족에 속해 있었으며, 국가라는 중앙정부는 사람들의 삶에 와닿지 않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왕권이 확립됨으로써 개인은 자신이 속한 부족이나 지역이 아닌 국가라는 중앙정부에 자동으로 편제되었으며, 중앙정부가 결정한 모든 사회제도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은 사나워졌다.
- 역사란 누구의 것인가? 역사란 소유물이 아니다. 어느 일방이 등기라도 해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변방의 역사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끼리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발해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해사를 우리만의 역사라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발해는 출발 당시에는 분명히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지만, 이민족에게 멸망당하고 그 영토와 백성마저 상실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타국의 변방사의 하나이기도 한 중첩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 고려라는 단일왕조의 형성으로 비로소 혈통이나 출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의 후손들)이 단일한 언어, 단일한 풍습, 단일한 제도, 단일한 문화와 역사권으로 재편되었다. 고려 이전의 여러 나라들을 강물이라고 보면, 고려는 그런 여러 강물들이 모여 만든 호수가 되는 셈이다.
- 사화와 당쟁의 원인은 정책대립 때문이 아니다. 사화와 당쟁은 어느 파벌집단이 권력을 차지하느냐의 헤게모니 싸움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권력을 잡으면 자신의 가문이 부귀영달에 접근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춥고 외로운 삶을 감수해야 하며 때로는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다 일단 한 번 자신의 소속집단을 정하게 되면, 그 소속집단의 운명이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후손의 운명과도 직결되었기에 죽느냐 사느냐의 방식으로 대를 이어가며 격렬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조선은 멸망했나 멸망당했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필연적 결과였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다 그만한 원인이 있는 법이다.
- 그러나 어느 누가 있어 그들의 책임을 물을 것이며, 어느 누가 있어 그들을 심판할 것인가. 책임 추궁도 심판도 없었다. 그 이유는 국권을 상실하게 된 원인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권상실을 오로지 부도덕한 일본제국주의 탓으로만 생각했지, 우리 자신에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자각은 없었다. 국권상실 전에는 국정파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층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되자 그 화살은 곧바로 일본제국주의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 사이에 국권상실의 주범이었던 지배층은 슬그머니 빠져 나갔다.
- 조선이 망하고 난 뒤에 왕실과 그 일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독립투쟁?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민심과는 전혀 동떨어지게 일본 황실의 친족이 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그들은 일본 황실로부터 작위를 받아 이른바 왕공족(
?c
;)이 됨으로써 일본왕실의 친족이 되어 부귀영화를 이어간다.
- 사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민족들인 한족, 만주족, 몽고족, 일본족에 의해 각각 한 차례씩의 굴욕적인 경험을 겪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란 그런 것이다. 긴 역사를 가진 나라치고 아무리 선진국일지라도 수치스런 순간이 없었던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문제는 그런 어두운 과거를 어떻게 극복해 내었는가다. 그러나 우리 역사상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자기성찰은 없었다. 10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심지어 지금까지도, 어떤 일이든 일단 지나가면 그만인 것, 이것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 한반도 분단이라는 이 비극적인 드라마를 기획하고 연출한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소련이었다. 그 드라마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사람은 이승만과 김일성이었고, 조연은 이들의 지지 세력들이었다. 모두가 열망했던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원래의 드라마는 결코 상영되지 못했으며, 그것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세력 다툼에 밀리거나 암살, 숙청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이 땅의 민중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엑스트라가 되거나 관객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 역사는 언젠가는 가야 할 길로 가게 되어 있다. 비록 수없이 지체되거나 돌아가는 경우는 있어도 결국은 가야 할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역사이다. 시간의 문제였을 뿐, 언젠가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스템은 종식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1948년 민주공화정부를 수립하면서 선언한 것이다.
- 해방이 된 것이 1945년 8월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것이 1953년 7월이다. 불과 8년간이라는 기간이다. 진달래가 여덟 번 피었다 지는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는 해방, 미소의 분할점령, 3년간의 미소군정체제, 분단정부수립, 그리고 3년간의 한국전쟁을 치렀다. 아무리 배짱이 좋고 여유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불과 8년 동안에 이런 엄청난 일을 겪는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옳은지, 어디로 가야 옳은 방향인지 정신 차리기 힘든 것이다.
-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6월항쟁이 있은 1987년까지의 34년간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낸 기간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달성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명실 공히 국제사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 이제 국민은 예전의 국민이 아니다. 기업도 예전의 기업이 아니다. 마음이 떠나면 몸이 떠난다. 기업이 떠나고 인재가 떠나면 국가는 껍데기만 남는다. 언제든지 국가를 떠날 수 있다는 것, 국가를 떠나는 데 있어 물리적·경제적·심리적·문화적 장벽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이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된 이래 한 번도 그 존재 의의에 대해서 도전받지 않았던 국민국가가,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해 그 존재 의의와 (자국민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 처음으로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