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일몰 빛을 받은 생장의 다홍색 지붕들이 한층 따스해 보였다. 첫 도시, 첫 풍경, 첫 까미노, 첫 둘만의 여행. 처음이기에 어색하고 서툴지만 처음이기에 더 강렬하게 와 닿는 것들. 그 강렬함이 무뎌진 감정에 기름칠을 하고 불을 붙였다. 타들어가는 해질녘처럼 가슴 한켠에서 타다닥 하고 불 지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 줌의 긍정을 짜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괜찮아. 우리에겐 앞으로 걸어야 할 나머지 29일이 있잖아.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보게 될 거야.”
왜 여태껏 몰랐을까? 비는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거북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한없이 차분하고 편안한 자연 현상임을. 그리고 비를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베르게가 단지 잠만 자는 곳은 아니었다. 한 공간에 놓인 여러 개의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하지만, 때로는 함께 요리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빨래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좋든 싫든 서로를 부대껴야 한다. 개인의 영역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허물어짐이 재밌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요리를 하며 친근해진 것처럼. 어느덧 낯선 알베르게, 낯선 순례자들에 대한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진다.
북쪽길이 사정없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츤데레 같은 연인이라면, 프랑스길은 걷는 내내 다정하게 말 걸어주고 상냥한 미소를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연인 같다.
새로운 순례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이 길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홀로 걷는 까미노야말로 내게 새로운 환희를 안겨주었다. 까미노를 걸은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되어 가던 참이었다. 만약 혼자인 게 익숙한 게 아니라, 혼자인 것 그 자체를 즐길 줄 아는 것이 어른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제야 어른의 기분을 조금 알게 된 것일까?
해산물요리는 형편없는 맛이었지만, 우리에겐 좋은 맥주와 와인, 음악, 그리고 붓과 팔레트가 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한번씩 몰아서 불어오는 센 바람도,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건네는 여유 가득한 인사도 좋았다. 아렌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나는 그 장면을 작은 종이에 꾹꾹 눌러 담았다. 별다른 이유 없이 들른 마을. 그 조용한 마을이 주는 평화. 그리고 마음의 뿌리까지 씻겨내는 듯한 평안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로그로뇨에서 머물러야겠어! 아까 순례자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꽤 볼거리가 많은 도시라 하더라고!”
나를 위한 결정인 척 말했다. 언젠가 조금 더 걷지 못한 것을 후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할 거라면, 마음이 흔들리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믿게 되었다. 주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프랑스길만 세 번을 걸은 거야?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진 않아?”
“음. 난 그냥 이 길이 좋아. 두 번째 걸었을 때도 달랐지만 세 번째인데도 또 다른 걸. 매번 새로워. 계절마다도 새롭고, 또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잖아? 난 그게 좋아.”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 다른 사건을 겪었을 그녀의 까미노와 나의 까미노.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들을 때는 흥미로웠고, 같은 길을 걸었기에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질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둘의 이야기를 합하니 더 큰 세계가 그려지는 것도 같았다.
정든 인연이 떠나간 자리가 새로운 인연으로 채워졌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에도 우리가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지금도 인생의 한 언덕을 넘고 있다. 각자 몇 번째 언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스물두 살의 엘리가 까미노에 오르게 된 이유와 스물아홉 살의 내가 까미노에 오게 된 이유가 다르듯이, 까미노가 끝나고 얻게 될 것들도 다를 것이다.
꼭 힘들게 순례길을 걸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길을 오른 이유가 단순히 관광이나 버킷리스트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무게를 가늠해보기 위해 쉽지 않은 결정으로 오른 길이라면 내가 짊어진 배낭의 무게를 느껴봐야 하지 않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두 발로 걸으며 내 짐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껴보려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막 걸으면 나중에 진짜 다리를 못 쓸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좀 아쉽지만 괜찮아요. 먼저 가서 요양하고 있을게요. 그래야 빨리 나아서 또 걷죠!” 그녀는 모든 구간을 걷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더 큰 그림을 완성시키기로 한 것이다. 즉 양 손에 든 사과 중에서 ‘완주’라는 사과를 내려놓고, ‘완성’이라는 사과를 선택했다.
“네가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앞으로 삶을 살아 나가면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대한 사실이 있어. 그건 바로 네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거야. 어떤 때 우리는 오늘처럼 13km밖에 걷지 못하겠지만, 우리 몸의 컨디션이 100% 회복되었을 때는 얼마든지 더 걸을 수 있어. 오늘 걷지 못했던 몫까지 말이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결코 우리 몸의 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너 자신뿐이거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를 땐, 각자가 하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존중해주자. 나에게도 그렇지만, 너에게도 소중한 여행이잖아.”
언어는 내게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하고 깊은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난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가족관계, 단편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하지만 플루 할머니의 파란 눈에 일렁이던 물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상이었다.
길가에 놓여있는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들. 음식을 먹고 자신이 빚졌다고 생각하는 만큼의 금액만 기부하면 되는 도네이션 바르. 길을 알려주고 “부엔 까미노!”를 외쳐주는 사람들. 지나가던 자동차의 운전자들도 순례자를 향해 경적을 울려주고 손을 흔들며 응원하기도 한다. 이처럼 호의와 선의가 가득한 길이 산티아고순례길이다.
이곳은 세속적인 계산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기브 앤 테이크가 필요 없는,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순수한 곳. 내가 이 길을 마치고 돌아간 세상도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짐을 내려놓고 보니 새로운 것들을 알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고 다녔는지. 그리고 그 짐을 덜어 놓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의 폭이 곱절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짐을 내려놓아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도 있다. 물론 그 무게를 감당하려던 이제까지의 노력들 없이 쉽게 내려놓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가장 어떠한 곳’보다는 사소한 구석에 감명 받는다. 작은 풀잎 하나도 어여쁘게 바라볼 수 있는 나의 눈과 구름 한 조각에도 미지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엉뚱함, 사사로운 즐거움도 틀림없이 행복이라 여기는 의지. 그런 것들이 모여 이 길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그려낸다는 것, 몇 년 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은 다리를 절뚝이거나, 무릎이나 발목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모두 마지막을 위해 각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는 듯했다. 간혹 이름은 몰라도 길 위의 어딘가에서 보았던 순례자들을 만나면 더 없이 반가웠다. ‘너도 살아남았구나!’ 하는 전후생존자들이 느낄 법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 작은 깨달음들은 인생을 대단하게 뒤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쉽게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체력과 마음의 힘을 얻었다. 까미노를 걸었던 순간이 영원히 내 안에 남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문득문득 그 깨달음들을 일러줄 것 같다. 중요한 삶의 무기를 얻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