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진지......글씨를 쓰다 말고 여자는 종이를 구겨 도로 핸드백 속에 넣는다. 경비원이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를 불러세운다. 집배원이 댁까지 몇 번이나 다녀간 모양이에요. 할 수 없이 제가 대신 받아놓았어요. 경비원의 머리에는 그새 더 많은 검버섯이 핀 것 같다. 등기 속달 우편물을 받아들고 계단을 올라간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 서서 우편물을 뜯는다. 새 여권이다.
--- p.68-69
여자는 나뭇잎을 꺼내든다. 책상 위로 상자에서 흘러나온 나뭇잎이 가득하다. 상자 속의 나뭇잎을 다 날려도 소식은 오지 않을 것이다. 지쳤어요. 나뭇잎 위에 글씨를 쓴다. 볼펜을 쥔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뭇잎에 구멍이 뚫리고 금세 조각조각 찢겨진다. 여자는 책상 위에 놓인 과자 상자를 통째 들고 창가로 간다. 창을 열고 한줌 가득 움켜쥔 나뭇잎을 날린다. 상자 안에는 이파리가 너무 많다. 상자를 창틀에 대고 쏟아붓는다.
--- p.243
방과 후 집으로 와보니 대문이 잠겨 있다. 여자는 한참 동안 엄마를 부른다. 쓰레기통을 밟고 담으로 기어오른다. 마당으로 뛰어내리다가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때 한 달이 넘게 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깁스를 너무 늦게 푸는 바람에 오른 쪽 다리는 석고와 같이 굳어져버렸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의사에게서는 심한 입냄새가 났다.
생선 내장들이 썩는 냄새였다. 의사는 네 오른쪽 다리가 성장을 멈췄다, 라고 말했다. 다행이도 넌 벌써 키가 다 자란 것 같구나. 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여자는 그 말보다 의사가 입을 열 때마다 여자의 얼굴로 날아오는 그 악취가 더 신경에 쓰였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자의 키는 5센티미터가 더 컸다. 오른쪽 다리는 그대로 있었다.
--- p.53
남자는 자신이 늘 서 있던 유리창 하나를 찾아 눈으로 더듬는다. 엉거주춤 선 남자를 비켜 사람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간다. 39층 남자의 책상 뒤에 박힌 유리창 하나는 찾을 수 없다. 광장에서 올려다보이는 빌딩 한 면만 해도 똑같은 유리창들이 삼백 개가 넘게 박혀 있다. 그림자 다리의 절반쯤에 도달했을 때 남자는 광장을 휘몰아부는 바람을 등에 지며 온몸을 옹송그린다. 그때 남자의 왼쪽 눈알을 찌르며 무엇인가 확 달겨든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내휘두른다. 커다란 나방 같다. 나방은 남자의 왼쪽 눈에서 오른쪽 뺨까지 짧은 포물선을 그으며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손바닥으로 왼쪽 눈을 비비며 땅바닥을 살핀다. 바닥에 떨어진 나방이 바람을 타고 한 발자국 뒤로 날아간다. 남자는 발을 들어 허공에 대고 크게 찍는다. 나방의 한쪽 날개 끝이 간신히 구두의 앞창에 잡힌다.
한겨울에 왠 나방이지? 왠쪽 눈을 찡그린 채 구두등 위로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이파리다. 구두 밑창으로 반쯤 밟고 있는 그것에서 발을 뗀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새가 있었나. 남자는 빌딩 앞 화단을 눈으로 며칠 전 내린 눈ㅇ니 먼지가 섞인 채 듬성듬성 쌓여 있다. 디귿자를 엎어놓은 것 같은 빌딩의 옴폭 들어간 그곳, 세 개의 회전문이 뚫린 그 앞으로 큰 화단이 있다. 사발시계 모양의 둥근 화단은 지난 가을, 빌딩 건립 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때 국화 전시회가 열린 이후로 움푹움푹 빈 구덩이가 패어 있을 뿐이다. 입이 벌어진 시멘트 부대처럼 구덩이 밑바닥에는 다른 곳보다 짙은 그림자가 고여 있다.
빌딩 그림자에 점령당한 화단을 계절이 한 발자국씩 더디게 온다. 봄의 한가운데 들어도 빌딩 앞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분다. 모종을 옮겨 심은 화단의 화초들은 늦게 꽃망울을 터뜨린다.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오른손을 꺼내 이파리를 집어든다. 인도고무나무 잎새다. 바싹 마른 누런 잎몸 위로 잎맥이 툭툭 불거져 있다. 잎맥을 들여다본다. 잎맥을 피해 아주 작은 글씨기 씌여 있다. 글을 쓴 그때까지도 잎맥에 물이 남이 있었는지 볼펜 볼 끝에 짓눌린 자리의 글씨는 조금 번져 있다. 누가 내 발 좀 걸어주세요. 흙바닥에 힘껏 나동그라지게요. 나좀. 102./186-187
--- p.
-- 광고 문구 말이야. 아무래도 약하지 않아? 좀 강한 거 있잖아.
남자의 얼굴 앞으로 사장이 주먹을 쥔 손을 들어올린다. '넘버세븐'으로 통하는 중국산 발모제로 떼돈을 거머줘었다는 사장은 정작 대머리다.
---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