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칸집에 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글을 쓰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했다. ‘아홉칸집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은 간단하지 않았다. 이 집은 작고 너무 소박해 누군가에는 그저 볼품없게 비춰질 것이다. 집을 이루는 아홉 개의 방은 쓰임새도 정해진 바 없고 마감도 되지 않은 채 그저 덩그러니 내던져진 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 『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는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9쪽, 에이리가족, 서문 「삶의 예술이 펼쳐지기를」에서
결혼을 하고 나니 거대한 우주는 너도 나도 아닌 식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깨달음을 깨알 같이 얻었다. 어쩌면 부엌에 관한 이 이야기는 가족과 코르뷔지에의 이야기처럼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나에게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고 각별한 까닭은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하루 세끼 중 아침 식탁이 더없이 소중한 건 하루를 시작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안녕히 밤을 보내고 식탁에서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고 앉는 순간 우리의 표정에서 흐르는 평온함 탓이다.
48쪽, 에이리가족, 「부엌」에서
어쩌면 정교하고 오점 없는 완벽한 콘크리트는 전혀 멋스럽지 않은 건조한 기술에 불과할지 모른다. 현장의 우연성으로 채워진, 의도한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모든 과정이 이 집의 콘크리트 표면에 자연스러운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결국 조금 덜 만들어짐은 섬세하지 않고 투박하며 때로는 오류로 비춰질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의 여지를 남긴다. 빛과 바람과 햇살이 이 덜 만들어진 여백을 풍화해나갈 것이다. 덜 만들어진 건축은 자연스럽다.
55쪽, 네임리스건축, 「콘크리트」에서
우리의 비밀기지는 최근 둘만의 데이트 장소로 이용하는, 밤에만 출입문이 열리는 옥상이다. 잠든 아이들을 남겨두고, 꽤 튼튼하지만 상당히 가파르고 층수가 많은 사다리를 사이좋은 도둑처럼 살금살금 기어 올라가 옥상에 다다를 때 묘한 매력이 있다. 어른들의 놀이터를 향하는 그 짧은 순간, 우리의 심장은 빠르게 뛴다. 어깨에 메고 온 의자를 펼치고 앉아 검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닿을 듯 말 듯한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올빼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형체만 드러난 숲 사이로 가만히 내려앉은 달빛 광채를 보고 있으면 신의 모습도 그 광채와 다르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83쪽, 에이리가족, 「옥상」에서
경험의 측면에서 아홉칸집은 아홉 개의 방을 지닌 집이면서 동시에 아홉 개의 방이 서로 연결된 길의 공간이다. 이 길들은 내부에서 크고 작은 흐름을 만들며 결국 창과 문을 통해 주변으로 연결된다. 아홉칸집은 그저 살아가기 위한 집이 아니다. 어쩌면 주변과 대화하며 들풀과 곤충, 주변의 자연과 관계 맺기 좋아하는 가족을 위한 산책로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129쪽, 네임리스건축, 「산책」에서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틈새를 이용해 놀이터를 만들어낸다. 좁은 공간에 벽 하나만 있어도 공간을 장난감 가게로 꾸밀 수 있는 건 아이들이 지닌 창조의 힘일 것이다. 침대와 벽 사이의 좁은 공간에 들어가 그림책을 보는 작은아이와 변기 앞에서도 장난감을 펼치고 노는 큰아이를 보면 공간에 대해 아이들이 얼마나 열려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어린아이일수록 장소에 대한 편견이 있을 리 없다.
207쪽, 에이리가족, 「비밀기지」에서
집도 그러하다. 완벽한 집보다 덜 만들어진 집을 선호한다. 덩그러니 내던져진 아홉 개의 칸은 마감도 되지 않고 방의 목적도 정해진 바 없는 그저 비워진 구조물이다. 살아갈 사람은 방의 쓰임새를 고민하고 그에 맞는 가구를 들여 생활의 흔적으로 삶을 채워나간다.
224쪽, 네임리스건축, 「여백」에서
사람들은 왜 이러한 시골에 땅을 샀냐고 묻는다. 나는 당당히 숲을 산 것이라고 대답한다. 숲은 계절에 따라 변하고 그 변화는 하루를 소중히 하며 지낼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삶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 있다. 가미스기에서 시작된 아홉칸집이 노곡리의 자연을 만나 완성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사회에서는 일의 효율을 높여 최고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하지만 회사를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순간부터는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집은 효율적인 삶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곳,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소파에 앉아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말이다.
258쪽, 에이리가족, 「집」에서
우리는 완성되지 않은 아홉칸집을 만들었다. 물론 집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건물이 물리적으로 완공되는 시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비워진 그릇이 완성되는 순간일 뿐이다. 그곳에 가족의 생활과 시간 그리고 기억들을 채워 삶이 깃든 집을 완성해간다. 집은 물리적인 실체인 동시에 물질화될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을 지닌다.아홉칸집은 이러한 집의 근본을 바라보고자 했다. 텅 비워진 그릇을 생활로 채워나가며 흐르는 삶에 반응할 수 있는 유동적인 공간. 그곳은 불필요한 요소는 덜어낸 아홉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최소의 건축이다.
261쪽, 맺음말 「미완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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