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중시하는 사상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학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은 인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하며, 5만 년에 걸친 선천 시대가 지나고 후천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에 응답하였다. 그리고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로 보았는데,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각자위심을 극복하고 한 몸처럼 살아가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 「전라북도와 전주 일대의 동학 포덕과정」 중에서
전주화약은 완산 전투 와중에 청국군과 일본군의 차입, 오랜 노숙에 따른 피로 등 정부측의 입장과 완산 전투 패배로 인한 사기 저하와 이탈, 농번기의 도래, 외국군의 차입에 따른 명분 약화 등 동학농민군의 입장이 반영되어 체결되었다. 다만 정부에서는 화약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원론적인 용어를 사용하였다.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안 27개조의 시행을 약속 받고 화약을 체결하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넘겨 주었다. ---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에 관한 고찰」 중에서
호남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관민상화기의 집강소 체제는 무엇보다도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혁명의 결실로 관민(官民)/민관(民官) 협치정부(協治政府), 거버넌스를 꾸렸다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행정에 있어서 관(官) 중심의 통치체가 아니라 관민이 같이 행정을 행한다는 관민상화의 정신은 오늘날의 거버넌스 정신, 곧 오늘날 정부/준정부를 비롯하여 반관반민(半官半民)/비영리/자원봉사 등의 조직이 수행하는 공공활동, 즉 공공 서비스의 공급 체계를 구성하는 다원적 조직체계 내지 조직 네트워크의 상호작용 패턴으로서 집단적 활동을 의미하는 거버넌스(governance) 원리와 통한다. 피치자가 직접 치자와 함께 자기통치를 행하는 이 협치 원리는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나 오늘날 대의제적 근대 민주주의 원리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는 정치에 관심이나 자질이 없는 자도 행하게 되어 자칫 무책임한 정치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반면 근대 대의민주주의의 경우 민의를 대변한다고 하지만 자칫 자신들의 이익만 대변할 가능성이 농후한데 반해 관민상화의 집강소 협치방식은 이 둘을 혼합한 성격으로서 일종의 정치전문가인 정부관료와 정치행위의 원천인 피치자가 함께 통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동학농민혁명과 전쟁 사이, 집강소의 관민(官民) 협치(協治)」 중에서
역사와 문학에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교두보로 지배 권력의 핵심인 서울을 향했지만 청일전쟁으로 좌절되었고, 전주화약이 이뤄졌다.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집강소를 통해 대중들의 꿈이던 대동 세상을 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경복궁 침탈 사건으로 동학농민군은 9월 18일을 전후한 시기에 재기포했다. 전주성을 떠나 서울을 향한 열망은 공주 우금치에서 좌절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도정은 문학작품에 투영되었고, 전주성 전투는 다음과 같은 역사 문학적 의미로 형상화되었다. 첫째,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군의 목표점이었고, 일정하게 그 뜻을 이루었다. 둘째, 전봉준을 영웅화하는 과정에서 전주성 전투의 역사 문학적 의미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셋째,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청일전쟁으로 인해 서울로 올라가는 대신 전주화약을 맺게 되었지만, 전라도 전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대동 세상을 열었다. 넷째, 2차 봉기 때 전주성은 서울 점령의 교두보로 인식되었지만, 우금치 패배 후 속절없이 관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전주성 전투와 역사적 의미」 중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중심으로, 완산전투라는 장소성을 더하면 ‘학살’이라는 이미지를 기획할 수 있다. 그러면 “가슴 뜨거운 분노와 자긍심에 기반한 감성적 기념사업”이 가능하다. ‘학살’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한국 민주주의 뿌리’라는 브랜드는 전주동학농민혁명과 역사문화공원에 담을 ‘장소의 영혼’이다. 전주에서의 저항과 학살, 즉 전주동학농민혁명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탄생하였다는 논리이다. 게다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저항(혁명), 학살, 이 속에서 피어난 ‘한국 민주주의’는 ‘꽃심’이라는 전주정신과 맞닿아 있어 향토사의 복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저항과 학살은 브랜드를 위한 핵심요소이고, 결국 전주가 전주동학농민혁명을 활용하여 기획하려는 상(像), 즉 장소의 가치는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아시아 민주주의의 효시’이다.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하여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주기 위해서는 관련 법률 개정부터 통합 마케팅, 공간 조성, 시민 교육, 세계화 등 종합적인 계획이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 「브랜드로서 전주동학농민혁명과 지속가능한 역사 교훈 여행의 과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