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수와 척도로 파악하려는 생각은 그야말로 독창적이었고, 이것이 곧 과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 아래로는 땅, 위로는 하늘의 모든 면을 이해하고 측정하려는 시도는 이 거대한 기획의 필수 항목이었다. 렌즈를 통해 인간의 시각이 확장되었고, 지식은 글자로 인쇄되었으며, 지리와 천문 지식이 늘어나면서 공간에 대한 감각 역시 폭넓어졌다. 또 수학이 발전함에 따라 합리성에 대한 감각도 자라났다. 미술가들은 이를 우주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묘사 방식인 기하학과 연관 지었다. --- 「시작에 앞서」 중에서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와 그 형상은 감각에 직접 포착되지는 않고 오로지 감각적인 ‘그림자 세계’에서 내면 형상으로 회귀할 때에만 포착되며, 이는 곧 우주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이다. 기하학은 바로 이 과정에 관여한다. … 플라톤 아카데미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의 간판으로 유명했으며, 『티마이오스』(여기서 그는 우주론적 기획을 밝혔다)에서는 ‘신은 기하학적이다. 기하학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고전기, 정신적 혁명의 시작」 중에서
생드니 대성당 건물은 저 높은 곳 즉 빛이 서려 있는 우주를 향하여 솟아 있으며, ‘마음을 밝게 하여 참된 빛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을 반영한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고딕 건축의 핵심을 담아내는 요소이다. 분명한 목표 아래 쉬제는 창문을 가능한 한 더 많이, 크게 만들도록 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데서 비물질적인 데로’ 향하여 천상의 세계에 닿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쉬제의 말로 설명하자면, ‘어두운 마음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 참된 세계로 올라간다. 이 빛을 보는 가운데 과거의 타락에서 벗어나 부활하는 것이다.’ --- 「중세 유럽 미술과 신플라톤주의 」 중에서
우주가 신에게서 나와 영혼의 단계를 거쳐 질료의 단계로까지 발현되었다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은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에게 특별한 호소력을 지녔다. 이 개념은 인간이 적절하게 내면의 지성을 도야하여 질료의 단계에서 영혼의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알라의 복된 비전을 인식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몇 가지 걸림돌도 있었는데, 특히 정통 신앙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은 쿠란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신플라톤주의는 서구에 이비케나로 알려진 이븐 시나(Ibn Sina, 980~1037)라는 인물에 의해 이슬람의 종교적 혈류로 흡수될 수 있었다. --- 「이슬람미술과 신플라톤주의」 중에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결국 투르크에 함락되자, 많은 비잔틴 학자들은 엄청난 양의 필사본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피난했다. 값을 매길 수 없이 진귀한 저작들을 품고 도착한 이들 학자들은 특히 피렌체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 대량의 지식이 유입되자 번역 수요가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관념의 보급과 토론이 촉진되었다. 9세기 바그다드에서 일어났던 것과 거의 똑같은 일이 이탈리아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 ‘황금기와 같은 이 세기는 거의 소멸할 뻔했던 자유학예인 문법, 시, 수사학, 회화, 조각, 건축, 음악에 빛을 불어넣고 살려냈다. 이 모든 것이 피렌체에서 되살아났다.’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1492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 「15세기 피렌체」 중에서
혼천의는 천문학을 상징하는 지물로, 천문학의 의인화인 뮤즈 우라니아(Urania) 역시 같은 의미로 읽혔다. 이 요소들은 그 지배 영토를 암시하는 수단으로 통치자의 초상화에 쓰였으며 가톨릭 성인들의 그림이나 엠블럼에도 통용되었는데, 후자의 경우는 천체에 관한 사색을 의미한다. … 캄파넬라처럼 많은 르네상스인들은 세계를 더 이해하고픈 열망을 품은 채 천체와 지구를 묘사하고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다. --- 「기하학적 우주론」 중에서
르네상스 시기에는 이상도시(Citta Ideale)를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꾸준했다. 조금 더 기분 좋은 생활공간을 만들고, 시민의식을 고취하고, 도덕 풍조를 향상시키고, 지역의 규칙을 통합하기 위한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은 다양한 자극을 받으며 이어졌고, 그로써 기존의 중세 마을과는 확실히 다른 이상도시를 계획할 수 있었다. 일부 이론가들은 도시의 사회 구조를 재편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지만, 대부분은 이상도시를 물리적으로 배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상도시 계획은 대개 기하학에 따른 다각형의 배열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많은 탁월한 인물들 곧 미술가, 조각가 그리고 철학자뿐 아니라 건축가들은 이 논의에 크게 공헌했는데 여기에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알브레히트 뒤러도 포함된다. --- 「르네상스의 이상도시들」 중에서
북부의 르네상스 미술은 철저한 관찰과 사실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에 대한 강조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정다면체에 대한 관심이 독일로 확산되었을 때에도 그곳 미술가들은 실용의 측면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즉 그 다면체들이 예술에 유용한지, 그리고 정다면체들로 어떻게 물리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지 등을 고려했던 것이다. … 독일 남부에서는 선원근법과 측량술, 지도 제작과 천문학이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발전했다. 새로운 학문이 요구하는 고급 기계와 과학 도구 및 그 밖의 것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 제조업 분야의 발전이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했다(뉘른베르크가 특히 그런 곳이었다). --- 「알프스 북부의 수학, 기하학, 원근법」 중에서
뒤러가 쓴 미술가를 위한 매뉴얼의 성공 사례에 따라 다른 이들도 유사한 책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 이 모든 저작은 당시 책과 출판업의 인기와 상업적인 성공에 힘입어 제작되었다. 이 번성하는 시장에서 경쟁의 압박이 저작물의 수준을 향상시켰고, 특히 삽화에서 지극히 높은 정확성과 명료함을 성취하도록 자극했다. 수많은 미술가들이 판화 및 목판 인쇄 매체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다는 점에서, 사실상 인쇄 혁명은 미술 그 자체에 심원한 충격을 주었다. 뒤러는 인쇄물을 하나의 미술 형식으로 고양시키려는 과정의 선두에 자리했다. --- 「16세기 독일의 기하학 책자들」 중에서
‘자연의 탐험’, 오늘날 우리가 과학의 모험심이라고 인지하는 것들은 르네상스의 초창기에 완전히 이교적인 신비주의에서 이끌어낸 견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파라셀수스, 아그리파, 존 디, 조르다노 브루노를 비롯한 많은 선구자들은 근대 과학에 관련된 바로 그만큼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연구들에도 관여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주해 논문에서 기하 도형을 사용했는데, 그 도형들은 증명에 관한 주석처럼 제시되었다.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번역된 바로 그때부터 이 ‘신비학의 전통’은 프리메이슨과 장미십자회 운동을 포함하여 유럽 신비주의 비밀결사회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 「신비주의와 마법사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