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사짜’와 결혼하려면 몇 평짜리 아파트를 가져오라는 집, 내가 평소에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을 몇 개 달라는 집(서민의 때를 벗기는 굿을 한다나),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 두고 살림만 하라는 집까지 ‘초면에 대놓고 실례’하는 분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대한민국에서 ‘부(富)’라는 것은 내가 결혼할 남자의 소유가 아니란 것을. 오히려 나는 그 부를 축적하게 해준, 그래서 참견이 당연한 그들의 부모님과 소개팅을 해야 맞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예비 며느리입니다. 제게 재산을 좀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 p.32
하다못해 나 같은 평범한 30대 직장인에게도 남자 상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외모 지적을 한다. “거 립스틱 좀 바르지. 오늘은 안 바르니까 덜 예쁘잖아.” (님아, 닥치고 댁의 뱃살이나 관리하세요) 난 내가 예쁜 모습을 그 놈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이후엔 아이를 픽업하러 어린이집에 갈 때만 립스틱을 발랐다. 한동안 칙칙하게 하고 다니니 누군가에게 또 이런 말을 들었다. “역시, 일 잘하는 여자들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군.” (아!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 p.58
제왕절개를 하겠다고 하니 간호사가 또 몇 번이고 만류한다. “제발, 어머님의 힘을 보여주세요!” 이쯤 되면 정말 뚜껑이 열리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님이고 나발이고, 그냥 수술해주세요! 지금 당장!” 그렇게 난 진통 스무 시간 끝에 애를 낳았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시간까지 다 기억한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자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드디어 네가 엄마가 되었어!”라며 아이의 얼굴을 보여주었지만, 난 하나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 주름투성이 애가 제 아이가 맞나요? 근데 이럴 땐 괜찮냐고 먼저 물어봐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 p.103~104
어떤 일에는 침묵을 추천한다. 주로 나를 넘어 내 가족에 대한 인신공격이 올 때 유용한 대처다. “사돈어른이 자꾸 애를 보려 하시는 거 보니, 돈이 필요하신가 봐” 등의 밑도 끝도 없는 모욕 말이다. 요즘 같은 육아전쟁 시대에 육아는 도와주지 않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시댁이 종종 있다고 한다. 친정에 드리는 보상 자체도 상당히 아까워하면서. 그럴 때는 조용히 눈을 깜박이고 상대를 응시해야 한다. 2, 3초 정도. 마치 “이거, 큰 실수 하신 거예요”라는 걸 상기시키듯. 그러고 무시해라. 정말 그 어떤 말을 꺼내는 것도 아깝다. --- p.133
이스라엘 교육의 원리가 ‘코칭’의 바탕이라던데 그 취지는 이해하겠다. 아이들의 생각을 누구보다 존중하고 기다려주라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뭐랄까, 그 존중에도 예외나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함께 책을 읽은 내 친구도 분노하며 말한다. (그녀는 여섯 살 쌍둥이 아들이 있다) “이건 책 앞에 해당 연령을 써줘야 되는 거 아니냐? 적어도 대화가 원활한 15세 이상 사춘기 자녀 전용이라고. 우리 집 애들한테 써먹어 보니 아주 날 물로 보더라.” --- p.154~155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모바일 앱을 만드는 팀에 파견되었을 때, 새로 만나게 된 남자 팀장이 물었다. “거기 팀장님은 누구 라인이죠?” “라인이요?”라고 해맑게 묻다가 멈칫했다. 그의 눈에서 “이 순진한 것아, 넌 아웃이야” 하는 이상한 느낌을 읽어버려서. 이후, 실무는 90퍼센트 도맡아했으나 상부 보고에선 늘 뒷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밑에서 행정처리를 하던 남자 사원이(아버지가 모 계열사 사장이라던) 팀장에게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모든 업무적인 공로도 그에게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 p.194
몇 개월간 노력해 브랜드 기획서를 가져가면, 상사는 말한다. “빨리 C 대리를 불러와 봐.” C는 청담동 빌라를 구입했다는 그 친구다. 그리고 그 기획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구성된 것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다짜고짜 묻는다. “그러니까, 이 디자인을 보니 어때? 자네의 취향에 딱 맞는가?” 상사의 무지함이나 배려 없음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같은 직급의 동료나 아래 직원이 이 같은 행동을 답습하면 무력감은 곧 패배감으로 변한다. --- p.261~262
바다 건너 미국엔 재미있는 조사 결과가 있다. 그것은 ‘허리케인과 불륜의 상관관계’다. 허리케인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조사해보니, 허리케인이 한 마을을 휩쓸고 가면 그 마을의 불륜 지수도 현격히 높아진다고 한다. 이유는 이렇다. 권태롭게 살아가던 한 중년 부인이 있다. 어느 날 허리케인이 와서 정원의 나무가 갑자기 망가져버린다. 부인은 정원사를 부르고 부인 앞에 멜빵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남편과 달리 거칠고 저돌적이며 체격도 우세하다. 그 순간 그 고상한 부인은 바람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만나보지 못한 ‘그 남자’에 대해 온갖 상상력을 풀가동하면서 말이다. --- p.293~294
가끔 “여기가 왜 노 키즈 존인가?” 하는, 정말 생뚱맞은 곳을 발견할 때면, 그건 나에 대한 정중한 거절로 들린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요. 그냥 오지 마세요. 여긴 제발 맘충들 때문에 분위기 망치기 싫거든요? 그냥 저희가 운영하는 업소이니 제 마음대로 하고 싶거든요?” 그 문을 구태여 부수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애써 증명해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 이처럼 절대 트집 잡히고 싶지 않은 엄마와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줄다리기는 오늘도 내게 과민한 일상을 만들어낸다.
--- p.305~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