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은 평범한 사람들도 의지만 있으면 지구 끝까지도 갈 수 있음을 증명해 보는 것에 목적이 있다. 또한 거동이 불편해져 뒷방 신세가 되었을 때, 자식들이 자신들은 엄두도 못 내는 남극과 북극 등 극지탐험을 다녀온 부모를 좀 대우해 달라는 기대감도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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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색인 북극곰은 나이가 들면서 약간 누런색으로 변하고 동작이 둔해진다. 사냥을 제대로 못해 죽은 동물의 사체를 찾아다니다가 병들어 죽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금까지 관측된 야생 북극곰의 최장 수명은 41년이고 동물원에서 예방접종과 음식 등으로 관리를 받은 경우는 좀 더 오래 산다.
물속으로 무작정 뛰어든 북극곰이 물개나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사하기 전에 익사하면 어쩌나 싶어, 11시에 리캡 강의를 했던 북극동물 전문가 Dima에게 물으니 10km 거리의 먹거리 냄새를 감지 한 곰이 그것을 찾아 움직인 것이며 한번에 30km를 수영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한다.
북극곰은 유빙 위에 숨구멍을 뚫어놓고 드나드는 물개들을 숨어서 기다리다 낚아채는 방법으로 먹이를 조달한다. 유빙이 줄어들어 그것도 쉽지 않아,
태어나 2년 뒤 독립한 새끼곰 2마리 중 1마리는 성년이 되지 못하고 죽는다. 먹이를 구하지 못해 아사하는 북극곰, 무리하게 수영을 하다 익사하는 북극곰의 수는 날로 늘어나는 추세다.
북극에 국경을 잇대고 있는 미국, 러시아, 캐나다, 덴마크,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들은 북극곰 보호 법규를 제정, 국제적인 대책 마련에 열심이지만, 사람들의 호응과 협조가 더 중요할 듯하다. 투어항로 중 북극점에 가까운 동 북 일부 구간에 빙산이 꽉 들어차 운항이 불가능하여 항로변경회의가 열렸다. Bird Cliff까지만 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말에 일부 탐험대원들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러나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들은 후에는 ‘Care is better than Sorry’ 하며 오히려 유빙이 많이 쌓여 있다면 북극곰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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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방겐 계곡 안으로 여러 개의 긴 폭포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폭포수가 바닷물을 밀어내어 이곳은 염도가 거의 없다. 낚싯대를 드리기 무섭게 민물송어가 걸려든다는 피요르드 낮은 언덕에는 몇 가구씩의 마을이 보였다. 하얀 교회건물과 국기가 걸려있는 공공건물이 카메라의 세례를 받았다.
8월 초인데도 느껴지는 찬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2시간 동안 갑판 위에 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경을 감상하였다. 피요르드 유람 후 30여 분 버스로 이동하여, 피요르드 깊숙한 곳 Sogndal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예쁜 상점과 특이한 조형물들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아름답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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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의 전설 카사노바 Giacomo Girolamo Casanova, 1725~1798 는 17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로 예술과 풍류를 즐기며, 평생 122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다. 16세 때 신학 강의와 추기경 비서까지 지냈으나, 두 자매 를 동시에 유혹하는 등 넘치는 육체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결국 성직을 떠났다. 희극배우 아들로 열등의식이 있던 그는 신분상승을 위해 사제가 되어 보았지만 실패한 것이다.
21세 때 심장 발작을 일으킨 귀족 브라가딘을 구하고 양자가 된 그는 사치와 도박으로 많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다가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려 신성 모독죄로 종교재판에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사랑했던 여인의 도움으로 베니스 감옥을 탈출하면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이제 나도 자유를 찾아 떠나며 당신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겠소”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가 1785년부터 13년간 보헤미아의 발트슈타인 백작의 성에서 사서 일을 하면서 기록한 글들이 지금도 체코의 둑스성 카사노바 기념관에 남아있다. 그는 『제이코 사메론』이라는 공상과학 소설과 40여 편의 저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썼다. 정치가, 시인이었던 카사노바의 이름이 애석하게도 성과 쾌락의 탐닉자로 세기의 바람둥이로만 부각된 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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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요 궁전 앞뜰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다. 324m, 81층 높이의 철탑을 제대로 사진에 담으려면 이곳을 찾아야 한다. 에펠탑을 향하여 1km쯤 걸어 내려가면서 점점 커지는 그 위용에 압도되었다. 에펠탑 은 에펠Alexandre G.Eiffel, 1832~1923 에 의해 1887년에 시공하여,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에 맞추어 1889년에 완공되었다. 이 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워싱턴 모뉴먼트보다 두 배나 높게 만드느라 160만 불이 소요되었다. 경관을 해친다는 반대 의견에 20년 뒤 철거하는 조건으로 완공된 에펠탑은 무선 안테나로 사용되면서 위기를 면했다. 1944년 8월 파리를 불태워 버리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다시 사라질 운명을 맞이하였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히틀러의 독촉에, 점령군 사령관 Choltitz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많은 동료 장군들 이 사형을 받았으나, 그는 파리를 지켜낸 공을 인정받아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6년 바덴바덴에서 72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장례식에 많은 프랑스 장군들이 참석하여 애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에펠탑은 매년 700만 명 이 찾는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에펠탑 바로 아래까지 걸어 내려가 수백만 개의 조각으로 조립한 정교한 철탑을 감상하였다. 2014년 가을, 장시간 기다림 끝에 힘들게 올라간 기억 때문에 25유로 하는 에펠탑 등정은 생략하고 세느강 야경 크루즈가 출발하는 Bateaux Mouches 선착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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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트라산 정상에 있는 Pena Palace는,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마누엘 2세가 1910년 영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살았던 왕궁이다. 정보센터 앞에서 434번 버스 왕복 5유로를 타면 페나궁 정문까지 갈 수 있다. 궁 외부 입장료는 10유로, 촬영이 금지된 궁 내부까지 볼 경우에 13.5유로이다. 정문 안에 들어서면, 왕복 2유로의 구내버스를 타고 페나궁까지 올라간다. 페나궁에서 바라본 신트라 시내는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다.
구내 버스를 타고 정문까지 내려와, 왼쪽으로 돌아서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Moorish Castle이 나타난다. 매표소에서 7유로를 내고 성곽에 올랐다. 물론 정문에서 기다리면 버스를 이용하여 편히 갈 수 있지만, 무어인들의 숨결을 좀 더 많이 느껴보기 위하여 숲 속을 걸었다. 무어성은 8세기 코란과 칼을 앞세우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아랍인들이 세운 성이다. 이곳은 16세기 알함브라 궁전을 빼앗겨 거점을 잃고, 모로코로 물러난 무어 왕조의 800년 영광과 한이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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