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시대에 쉬즈모는 근대 초기 낭만주의 시대를 향한 향수의 아이콘으로 다시 부상되었다. 오랫동안 혁명의 무게에 짓눌려온 대중들은 과거의 영화로운 시절에 대한 갈망과 향수를 갖게 되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고자 했던 정부 쪽에서도 초기 자본주의 문화를 복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입증하는 역사적 실체가 필요했다. 어느 쪽의 시각으로 보건, 쉬즈모만큼 근대화 시기의 낭만적 이슈에 두루 관련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는 드물었다. 그럼으로써 쉬즈모의 창작인생은 가장 낭만적인 문학시대에 관한 스토리텔링의 풍요로운 원천으로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다.
--- p.21
하지만 저우쭤런이 목격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하고 자잘한 일상이라는 것은,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통제되고 포섭되는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헤론다스의 작품을 보면 고대 그리스 사회는 우리가 르네상스 이후 일종의 이상향처럼 생각했던 것과 같이 그렇게 고상하지도 또한 그렇게 뛰어난 도덕성을 수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도 성적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정복욕에 눈이 멀고, 노예라는 이유로 인간을 함부로 대하는, 흠이 많은 사람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저우쭤런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목격되는 일상을 통해 지배질서가 관철되는 단일한 모습의 과거가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린 성긴 과거의 모양새를 발견했다. 이 구멍들 사이로 여성, 민중, 타자들의 다양한 경험은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빠져나오는 것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묻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잠재성으로 남아 항상 폭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저우쭤런이 발견한 일상성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인 성격이었다.
--- p.57~58
천국과 지옥. 휘영청 밝은 달과 잿빛의 평원. 그리고 죄악과 도덕. 이런 상대적인 이미지들은 한데 어우러져 상하이의 도시 공간이 가진 명암을 감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무스잉에게 상하이는 아름답고 즐겁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화려한 밤 문화는 이튿날의 허무함으로 이어졌고 채워지지 않는 그의 욕망 끝에는 오직 ‘무無’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술, 담배, 춤, 도박으로 점철된 그의 삶에서 무스잉은 허무함을 잠재우기 위해 더 강도 높은 유흥 문화를 추구했다. 그 결과 그의 일상은 피로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 p.98
머물 곳을 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중국의 현실 가운데 루쉰은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유목민과 같은 삶을 선택했다. 그가 선택한 유목민적인 삶은 우선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철학적으로는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삶의 형식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에도, 삶의 매 순간마다, 자신이 품은 이상과 가치가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현존재에 대해 불만을 품는 삶의 방식이 바로 루쉰이 선택한 유목민적 삶이 아니었을까.
--- p.118
선충원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이러한 이상적인 공간에 배치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었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평범하면서도 적극적이고 자연에 동화된 인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선충원은 서툴고 거칠고 빈곤하고 때로는 현실의 고통마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샹시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동화되는 원시적인 인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 p.156
베이다오는 망명 시기 가장 힘든 시기를 이겨낸 원동력으로 글쓰기, 가족에 대한 책임, 음주를 꼽은 바 있다. 그중에서도 “글쓰기는 자신과의 대화이자 심리 치료에 해당하며, 글쓰기 중에 부단히 새롭게 자리 매김하며 생존의 의미를 확정짓는다(베이다오, 2015)”는 말에서 이 시의 의미를 살필 수 있다. 작가는 창작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꽃’으로 상징되는 이상과 당위를 끌어왔으며 이에 의지해 필연의 여정에 반항한다. 이를 통해 사랑의 빛으로 가득 찬 세계를 제시하고 독자에게 시적 가치, 즉 인간다운 삶과 당위로서의 이상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 p.191~192
이러한 배경 속에 20세기를 맞이한 중국 연극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하나는 경극에 새로운 내용을 담는 것, 다른 하나는 서양식 연극을 수용하는 것. 이 두 임무가 계몽, 나아가 구국이라는 대전제로 수렴됨은 물론이다. 연극을 여흥의 일부로만 여겨왔고, 그래서 배우를 매춘부나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천한 직업으로 여기던 당시 중국의 풍토에서 생각해보면 모두 만만치 않은, 아니, 솔직히 말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의심스러울 일이 임무로 주어졌다는 말이다.
--- p.204
소설은 뜻밖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이듬해 7월 금성도서공사金城圖書公司에서 출간한 단행본은 3년 사이 7판이나 인쇄되었다.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소설은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결말로 끝이 나는데, 이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주인공을 살리고 온 가족이 다시 만나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어달라는 것이었다. 원작자인 친서우어우의 요지부동에 결국 저우서우쥐안이 주인공을 극적으로 되살려 속편 격인 『신추하이탕新秋海棠』을 창작하여 발표하기도 하였으니, 당시 『추하이탕』에 대한 대중 독자들의 반응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 p.234
특히, 그는 한족과 이민족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에 주목하였고, 역사적 인물과 사실을 자기 이야기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첫 작품인 『서검은구록』에서부터 건륭황제와 청초의 반청복명 활동을 이야기로 끌어들인 진융은 이후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에서 송말宋末부터 명明 건국 초기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실제 인물들을 강호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는 『벽혈검』, 『천룡팔부天龍八部』, 『녹정기』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는 이를 두고 ‘역사를 가지고 장난한다戱說歷史’라고 힐난하였다. 이런 언사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서는 달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융은 무협소설의 방식으로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과거 중국의 오욕과 굴종의 역사를 진융은 협객을 동원하여 무협소설 식으로 상상해냈던 것인데, 이렇게 탄생한 그의 강호는 일종의 상상의 역사이자 상상의 중국인 셈이다.
--- p.266
신문학은 ‘새로운 글’ 혹은 ‘새로운 글쓰기’라고 할 수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17년을 기점으로 한다 함은 이 해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새로운 글쓰기와 글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글의 무엇이, 왜 변했는가? 또 변화한 모습은 어떠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지금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데,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 중국에서 ‘문文’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문과 다스림, 즉 글과 정치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중국에서 글은 정치나 사회체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 p.285
딩링은 이 글에서 전시 상황에서 여성이 처한 여러 문제점들, 예컨대 여성의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가부장적 인식과 여성을 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을 지적하는 한편, 여성들이 남성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딩링은 이 글에서 공산당 근거지에 합류한 여성들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억압받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지만, 혁명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딩링의 「3·8절의 감상」이 발표된 후 마오쩌둥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옌안 문예좌담회 3차 회의 중 단체 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 마오가 물었다. “딩링 동지는 어디에 있나요? 좀 가까이 와서 찍으라고 해요. 내년에도 또 「3·8절의 감상」 쓰지 말고.”
--- p.329~330
마오쩌둥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생활은 곧 문예의 원천이며 문예에 비해 더욱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민은 여전히 문예를 필요로 하는가? 마오쩌둥은 이에 대한 대답을 ‘전형화’에서 찾고 있다. ‘전형화’란 쉽게 말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잡다한 모습을 특정한 이념형에 맞추어 재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습은 수만 가지가 있지만, 문예는 그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습을 작품의 이념 안에서 다시 창조해내는바, 이 과정을 곧 ‘전형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