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신음이나 약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엘시는 입을 다문 채 정우의 뒤편을 응시했다. 그곳은 그가 조금 전 걸어왔던 복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번에 알아볼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엘시가 정우의 뒤쪽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 했을 때 정우가 문을 닫았다. 정우는 엘시를 올려다 보았다.
"예. 저예요."
엘시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손짓으로 그녀를 비켜서게 했다. 정우가 옆으로 물러난 후 그는 직접 문을 열었다. 대장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 뒤에는 복도가 있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엘시는 잠깐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엘시는 정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라수의 방입니까?"
"예?"
"정우. 당신은 라수의 방에서 여기로 온 겁니까?"
"네, 그래요."
제국군의 장교들은 다시 신음을 흘렸다. 엘시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이 방에서 라수의 방으로 바로 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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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아요."
지멘은 몸을 부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실은 볼에 깃털을 붙인 채 발을 쾅쾅 굴렀다. 소녀는 자신의 허리에서 밧줄을 잡아채어 지멘에게 내밀었다.
"붙잡아요! 그 줄을 붙잡고 따라와요! 저 앞에 있는 건 쟁룡해도 아니고 엘시 에더리도 아니에요. 물구덩이일 뿐이라고요. 그러니 저를 따라와요! 제가 물에 빠지지 않으면 당신도 빠지지 않아요. 당신이 그랬죠? 레콘은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잘난 척 하며 떠들었죠? 부리로만 떠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몸으로 보여요!"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실은 밧줄을 움켜진 손끝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한 근육들이 팔 속에서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흐느낌에 놀라 아실은 황급히 팔을 끌어당겼다. 좌절감이 그녀의 팔을 훔쳤고 아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밧줄을 느꼈다. 손바닥이 아팠다.
천하를 뒤흔든 제2차 대확장 전쟁으로부터 50년이 지난 후, 신아라짓 왕국은 채 왕국으로서의 형태도 갖추기 전에 제국으로 탈바꿈한다. 원시제를 거쳐 치천제에 이르는 통치 기간 동안 세상은 제국의 질서 아래 자리 잡고, 하늘을 나는 수도에 머물며 제국을 다스리는 치천제는 자신을 거역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토벌하며 제국의 안전을 꾀한다. 그러나 토벌대에게 전멸당한 분리주의자의 잔당 중 황제 사냥꾼이라 불리는 검은 레콘과 그를 따라다니는 외눈박이 인간 소녀는 황제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른다. 각지에서 약탈을 통해 군자금을 모으던 그들에게 황제는 대장군을 위시한 추격대를 보낸다. 그러나 대장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배신자를 만나 위기에 빠지고, 그 사이 치천제는 자신의 계획대로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