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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평전

: 420년 만에 다시 본 이순신과 임진왜란

이민웅 | 책문 | 2012년 11월 08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3 리뷰 12건 | 판매지수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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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11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998g | 170*223*30mm
ISBN13 9788931576177
ISBN10 89315761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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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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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가문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결코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두어 가지 사례가 더 있다. 그 하나는 갑오년甲午·1594년 봄에 이순신 자신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몸이 많이 불편했을 때, 집에서 보낸 비碑·여종 네 명과 관官에서 보낸 비 네 명이 한꺼번에 진영에 도착했는데, 그는 그중 한 명만 남기고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전쟁 중에 주인의 병수발을 위해 집에서 여종을 네 명이나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집안 형편이 좋은 편이었음을 증명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기존의 위인전이나 TV 드라마, 혹은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등에서, 이순신이 몰락한 가정형편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묘사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요컨대 이순신은 명망 있는 사대부 가문에서 나름대로 유복하게 자라면서, 조선 성리학에 기반을 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로 성장했던 것이다.
---「제1장 전쟁의 신, 태어나다」중에서

이순신의 집안은 조상들의 빛나는 관력官歷을 이어나가기 위해 문과文科에 집중했다. 이에 비해, 원균은 무과 출신으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한 부친 원준량元俊良의 임지를 어린 시절부터 따라 다니면서 다소 이른 시기에 군문軍門에 들어섰다. 이 때문에 1540년생으로 이순신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원균이 이순신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설정은 무리가 있다. 즉 원균이 부친을 따라다니기 전에는 이순신이 너무 어려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조금 더 성장한 뒤에는 각각 다른 길을 갔기 때문에 역시 어울릴 수 없었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그린 것처럼 이순신이 골목대장 원균을 따라다니며 존경하고 부러워했다는 설정은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아마 같은 동네 출신으로 서로 아는 사이였을 정도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
---「제2장 문과를 접고 무과로」중에서

결국 이순신이 걱정한 대로 그해 가을에 여진족이 노략질을 하기 위해 침범하였다. 그는 노략질하고 도주하는 적을 공격하여 적의 간부급 중에 몇 명을 사살하고, 사로잡혔던 군사 60여 명을 구하는 등 최선을 다해 분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도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볼 때 이 전투는 ‘패전’이었다. (중략) 이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자, 선조는 이 전투가 단순한 패전이 아니므로 이순신으로 하여금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이순신은 생애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사실이 또 하나 있다. ‘백의종군’은 원래의 계급이 삭직 또는 강등되어 일개 병졸로 근무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직책만 정지될 뿐 신분은 그대로 유지한 채 대장을 보좌할 수도 있고,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면 복직될 수도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원래 직책의 직무가 일시 정지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의종군 기간에도 고관高官일 경우 군관 1~2명의 보좌를 받을 수 있었고, 이동 시에는 말을 타고 다녔으며 출장비나 생활비까지 받을 수 있었다.
---「제2장 문과를 접고 무과로」중에서

그는 약 2세기 전인 14세기 전반에 만들어져 한강漢江에서 시험 운행을 했었다는 ‘거북선龜船’을 다시 창제하였다. 거북선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함께 임진왜란 해전의 완승을 이끈 무적의 함선이었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기존의 거북선에 비해 배의 크기와 형식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창제創制라는 용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 이와 같이 해전에서 사용할 돌격선突擊船을 미리 만들었던 흔적도 《난중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3장 나는 조선의 수군 장수다」중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을 위협하기 위해, 조정에 보고하러 가는 군관으로 하여금 “신臣은 이제 전선 수만 척을 이끌고 비장군飛將軍 아무개를 선봉으로 삼고 바로 일본을 치러 아무 달 아무 일에 떠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거짓 장계를 흘려 일본군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전쟁이 터진 뒤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패퇴하면서 급기야 6월 14일 평양성이 함락되어 평양 북쪽에서 전선이 형성될 위기 상황에서, 해전에서 전승을 거둔 이순신이 일본군에게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조정에 편지를 보내 “수군 10여 만 명이 또 서쪽 바다에서 오는데 대왕의 행차는 이제부터 어디로 갈 것이오.”라고 한 것처럼 적을 위협하는 내용이다.
---「제6장 한산도와 부산포에서 연거푸 이기고」중에서

미륵도彌勒島에 사는 목동牧童 김천손金千孫이 연합함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서 긴급한 정보를 전달했다. 그가 전달한 정보의 내용은 “적의 대ㆍ중ㆍ소선을 합해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경에 영등포 앞바다에서 이동해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見乃梁에 머물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레이더가 없던 전근대에 적의 위치와 병력 상황을 먼저 안다는 것은 해전에서 엄청난 이점이었다. 그것도 해전 전날 지근거리에 있는 적 함대의 규모와 위치를 먼저 파악하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원래 김천손은 미륵도에 거주하던 목동으로, 일본군이 침입하자 가족을 이끌고 산 정상 부근으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이날 미륵산 정상에 올랐다가 남해의 한려수도를 기준으로 북동쪽 방향에 일본의 와키사카 함대가 지금의 거제대교 부근의 견내량에 도착한 것을 보았고, 잠시 후에는 반대편 당포 선창에 조선 수군이 도착하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김천손은 곧바로 조선 연합함대가 있던 당포로 달려와 자신이 본 것을 알려 주었다. 오늘날의 통영만을 사이에 두고 7월 7일 견내량과 당포에 정박한 양국의 함대는 김천손이 정보를 전달하기 이전까지 이런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이처럼 일개 목동까지 나서서 귀중하고 생생한 정보를 조선 연합함대에 전달한 것을 통해, 당시 조선 수군이 정보를 주는 연해민에게 포상하는 등 소통을 위해 노력했으며 연해민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6장 한산도와 부산포에서 연거푸 이기고」중에서

임진왜란 첫해에 벌어진 해전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첫 번째 출전은 옥포해전 등을 통해 일본의 소규모 함대를 연파하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출전에서는 처음으로 연합함대를 형성해 일본의 지방 수군을 연파하면서, 육전과는 반대로 해전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조선 수군에게 안겨주었다. 이어서 이순신이 이끈 연합함대는 7월 8일의 한산대첩 등을 통해 일본의 중앙 수군을 격파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전금지령’을 이끌어냈고,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컸다. 그리고 9월 1일 벌어진 부산포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본거지까지 공략해 대승을 거둠으로써 일본군으로 하여금 후방 병참선을 염려하게 할 정도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첫해에 해전에서 거둔 전승10전 10승의 전과를 종합하면, 일본군선 320여 척을 분멸한 데다 일본군 사상자도 2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에 비해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군선도 손실되지 않았고, 사상자도 200여 명 미만으로 일본에 비하면 미미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화기를 이용한 당파撞破 전술과 화살과 불화살 등을 이용한 조선의 해전 전술이 적선敵船에 올라타서 단병 전법을 구사했던 일본 수군의 전법에 비해 한 차원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승은 무엇보다도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수군 장수가 임진왜란 14개월 전에 전라좌수사가 되어 전란에 대비해 수군을 강하게 조련하고 여러 방면에서 차근차근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6장 한산도와 부산포에서 연거푸 이기고」중에서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순신은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일본 함대를 찾아서 공격하지 않았을까? 적의 전선 500여 척이 연합함대 가까이 접근했는데 별다른 해전이나 전투를 벌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료를 들여다보면, 당시 이순신이 일본 함대를 찾아 공격하지 못한 것은 일본 함대가 조선 수군을 철저히 회피했기 때문이다.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일방적으로 회피하는 적과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이순신은 답답한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이순신은 두 가지 전략적 해결책을 고안해 냈다. 그가 내린 첫 번째 해결책은 수륙합동작전이었다. 이것은 조선 육군으로 하여금 육지에 둥지를 틀고 있던 일본 수군을 바다로 몰아내게 한 뒤에, 조선 수군이 이들을 공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그는 차선책으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더 끌어올려 수군의 힘만으로 일본군과 상대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조선 육군이 일본군을 축출해 낼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이순신은 ‘전선 건조’와 ‘무기 제조’ 등 수군 전력을 증강해 일본 수군과 맞서기로 결심한다.
---「제7장 강화 교섭기에 수군이 맞은 큰 위기」중에서

열악한 상황에 처한 조선 수군의 전염병 피해는 점점 커졌는데,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계사년1593년 여름을 지나면서 이순신은 “진중의 군사 태반이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군량이 부족해 계속 굶던 끝에 병이 나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언급하며, 이때까지 전라좌수군의 전체 병력 6,200명 가운데 약 10퍼센트인 600여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한 인원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150여 명 내외일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나머지 인원은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사망자와 환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전염병 피해는 그 다음해인 갑오년 연초에 더욱 심각해졌다. 이순신이 여수 본영을 떠나 한산도로 이동한 지 불과 이삼일 뒤인 1593년 1월 21일과 22일에는 하루에 각각 214명과 2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제7장 강화교섭기에 수군이 맞은 큰 위기」중에서

통제사 이순신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자, 선조는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른다.”라고 지적하며 “우리나라는 끝났다.”라고 극언까지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직후인 정유년1597년 1월 12일, 조선 조정은 가토가 150여 척을 이끌고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에 도착했고, 그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다는 고니시의 언급을 기록한 황신黃愼의 보고서를 받았다. 이날 선조는 곧바로 “가토가 도해했으니 나랏일이 이미 결딴났다.”라고 하면서 가토를 잡지 않고 놓아준 이순신을 잡아들이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을 것을 비변사에서 논의하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일본의 반간계는 성공을 거두게 되며, 선조는 이순신을 더욱 의심하게 되어 결국 그를 처벌하게 된다. 이어진 1월 27일 회의에서 윤두수는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내리고 원균을 수사로 재기용해야 한다고 또다시 건의했고, 선조는 “지금은 가토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라고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제9장 백의종군과 칠천량해전의 패배」중에서

명량해전이 역사적 의의가 크고, 해전 자체가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덧붙여져서 사실과 허구가 혼동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세 가지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쟁점은 ‘철쇄鐵鎖 사용 여부’이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할 때 해협의 가장 좁은 양편에 철쇄를 걸어 일본의 군선 수백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것인데, 결론부터 밝히자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說話이다. 먼저 철쇄 이야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최초에는 조상祖上의 전공戰功을 확대 과장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난중일기》에도 나오는 전라우수사 김억추라는 인물은 원래부터 용력이 뛰어났는데, 수군 수백 명의 힘으로도 걸지 못한 철쇄를 맨손으로 혼자 걸었다는 데서 이 설이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순신으로 바뀌면서 명량해전의 승리를 손쉽게 설명하는 도구로 ‘철쇄’가 등장했고, 이 설화는 역사적 사실과 뒤섞이는 지경으로까지 발전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고대의 전쟁사 중에서 살수대첩의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귀주대첩의 강감찬姜邯贊이 보堡로 물을 막아 대승을 거둔 이야기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뒤섞이면서 구분이 애매해졌고, 그러면서 흥미롭고 설득력이 강한 철쇄설이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제10장 명량에서의 위대한 승리」중에서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 세 사람 중에도 수공자로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 이와 동시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1등 공신에 권율과 함께 원균이 들어간 것은 공신 선정 과정에서 선조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왕조 국가의 특성상 국왕인 선조의 의지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었지만, 선조는 앞에서 말한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의 규모 차이를 통해 무장들의 전공을 저평가한 데 이어 또 한 가지 왜곡을 더했다. 당초 2등 공신으로 올라왔던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올린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선조는 두 사람의 공로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평가한 것으로 수공자 이순신의 공로를 깎아내리는 효과가 있었다. 즉 전란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선조 자신이 노력해서 참전시킨 명나라 군대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전란을 극복하는 데 영향을 줄 만큼 탁월한 전과를 올린 조선의 무장들은 사실상 없다고 규정한 것이다. 또한, 있다 하더라도 이순신과 원균의 공과가 서로 비슷하다는 식으로 평가함으로써, 이순신이 세운 전공의 가치를 철저하게 폄하한 것이다. 선조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몇 가지 포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 국가의 수장으로서 전쟁을 미리 막지도 못하고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한 데 이어 명나라로 피신할 것까지 고려했던 선조로서는 전쟁 초기의 패전 책임을 모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조정 대신들을 대하면서 그토록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이순신의 전공을 제대로 평가하게 되면, 자신의 용인술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는 꼴이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제12장 나라 구한 영웅으로 남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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