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교회에 오면 궁극적으로 악한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된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노는 것보다 아름다운 추억은 없습니다. 때로는 철없이 강대상을 오르락거리고 교회 물건을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교회에서의 좋은 추억은 장성한 후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라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안수하심을 바라고 오는 아이들이 천국에 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_마 19:14-15
나의 공로와 자격으로 제자들처럼 무시하고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친절하지 못하고 내 태도에 겉치레와 위압이 느껴진다면 어린아이를 막는 것입니다. 교양은 있어 보이는데 아이들이 그 사람에게 말을 편하게 할 수 없다면 그는 아이들을 금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나보다 학력과 신분이 낮은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기 어렵다면 내가 꾸짖고 있는 제자입니다. 날마다 기도하며 주님께 어린아이를 데려가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 p. 30-31
대제사장들이 교인들을 달달 볶을 때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제사장의 가르침을 받으면 나도 똑같이 예수님을 못 박고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100% 죄인이기에 대제사장의 지위와 서기관의 학식이 부러워서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의 박사는 그래도 덜 부러운데 교회 다니는 박사는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받다가 그 가르침대로 시집 장가를 가고 취직을 했는데 능욕당하는 결혼 생활, 직장 생활을 하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이런 고난의 십자가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이방인에게 넘겨져 희롱당하고 침 뱉음을 당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억울해하기만 합니다. ‘나는 이렇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하면서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내 옆에 예수님으로 있는 배우자를 죽이고, 시댁 식구를 죽입니다. 남편을 미워하고 상사를 증오하며 허랑방탕하게 삽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고생하는데 차이가 무엇입니까? 똑같이 고난당해도 예수님과 대제사장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무 죄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능욕을 감당하고 기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힘들어 죽겠어서 교회에 왔더니 금식 열흘 하면 남편이 온다, 취직된다, 이렇게 간명한 해답을 내놓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처럼 썩어져라, 십자가 져라, 채찍질당해라 하니, 아멘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분명한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내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능욕을 감당하고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 p. 85-86
내가 말만 하고 행치 않으니까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 지웁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_마 23:4
무거운 짐을 지우고 세세한 조항까지 엄격히 지키도록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피할 방법만 찾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613개의 율법 조항에 추가 조항을 달았습니다. 대랍비 엘리에셀은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 횟수를 보통 노동자, 나귀 몰이꾼, 낙타 몰이꾼, 뱃사람 등 직업별로 규정했는데,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바리새인 규율에서는 아내 아닌 여자와는 말도 하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라는 것으로 변했고,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가다 벽에 부딪혀 피가 나는 ‘유혈 바리새인’은 거룩함의 표시로 붕대를 감고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사에서도 보면 바리새인을 능가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4세기경 수사들은 빵과 소금과 물만 먹고 살았습니다. 어떤 수사는 10년을 원형 새장 같은 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처음 믿는 사람에게는 기쁨부터 가르쳐야 하는데 “새벽기도 해라, 철야예배에 나와라, 십일조 생활해라” 하면 도리어 믿음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수요예배, 목장예배에 와 보라고 권면할 수는 있는데, 이것은 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모세의 자리에서 칭찬을 받다 보니 시댁 가서 핍박받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고르반’ 하고 부모에 대한 의무도, 형제에 대한 의무도 안 합니다.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고 손가락 까딱 안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시댁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는 우상숭배야. 나는 예수 믿으니까 안 돼. 동서가 음식 다 해” 이러면 안 됩니다. 제사 드리는 시댁과 친정에 가야 합니다. 음식도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절은 못하겠다고 하십시오. 그로 인한 핍박을 달게 받으십시오. 매도 웃으면서 맞으십시오. 그런데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고르반, 나는 나실인이다, 나는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이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맞지 않는 나의 모세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내려오지 못하는 자리가 무엇입니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긍휼도 없으면서 행하는 나의 율법은 무엇입니까? --- p. 253-254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주의는 본질상 위선을 부추긴다. 내면의 진상을 은폐할 수 있는 행동 목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신학 대학이나 기독교 캠프, 심지어 교회에서도 사람들은 영적으로 보이는 법을 터득한다. 외면을 강조하면 그만큼 꾸미기가 쉽다. 내 생각에 위선의 해결 방안은 완벽 아니면 정직,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완벽은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안은 회개에 이르는 정직이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가장 먼저 영적으로 보이는 법을 터득합니다. 기도도 흉내 내서 합니다. 외면을 강조하면 내면은 꾸미기 쉽기 때문입니다.
때마다 처방이 다르지만 처음에는 사건이 왔을 때 알려야 합니다. 나중에는 참고 인내해야 할 시기도 있지만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알려야 합니다. 내가 오픈하면 사람들이 안다는 것 때문에 평
생 겸손하게 살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을 돕는 약재료가 됩니다.
어떤 일을 치리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치리 받을 만한 죄를 저질렀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데, 사람들은 교회가 죄를 치리하면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말씀이 좋다는 건 적용할 때 입증되는 것인데, 말로만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적용이 안 되는 걸 봅니다.
선교사가 어떻게 음란의 잘못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사랑한다면 말해야 합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죄를 덮고 있으면 내가 죽습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염시켜야 합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눈먼 자가 많습니다. 주님이 보라고 하시는 데 못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회칠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주위의 눈이 무섭고 바뀔 환경이 두려워 회칠한 채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삶을 살고 있진 않습니까?
--- p. 292-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