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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위징아

요한 하위징아

[ 양장 ]
리뷰 총점8.7 리뷰 17건 | 판매지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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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1월 1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35쪽 | 568g | 153*224*30mm
ISBN13 9788994054308
ISBN10 899405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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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역사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요한 하위징아는 다른 역사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보다는 역사가가 아닌 다른 작가들과 비교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의 작품은 역사서로 읽히기보다는 일련의 우화寓話로 더 잘 읽힌다. 사실 그를 역사가라고 생각하고서 그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어떤 일관성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네 편의 저작, 『중세의 가을』, 『에라스뮈스』, 『내일의 그림자 속에서』, 『호모 루덴스』에서, 하위징아는 이 작품 순서대로 각각 역사가, 전기작가, 문명비평가, 인류학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위에서 일관성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은 다른 어떤 역사가 못지않게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소재보다는 주제의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하위징아는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는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유일한 네덜란드 작가이다. 그를 작가로 생각하고 그의 저작을 읽는 독자들만이 하위징아 저서의 지속적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p.14

하위징아는 어떤 신문에 기고한, 위대한 독일 역사가 랑케Ranke에 관한 글에서 ‘클래식(고전)’이라는 단어를 정의한 바 있다. 그는 그 글을 쓸 당시 독일의 문헌학 대회에서 네덜란드로 막 돌아온 참이었는데, 독일 체류를 아주 편안히 여긴 듯하다. 사실 그 자신이 학문의 초창기에는 문헌학자로 훈련을 받았고, 그래서 그 분야 학자들의 환대는 그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후에 역사학 교수로 자리를 얻었고, 또 역사학 논문을 많이 썼지만 문헌학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 내용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독일 유학 시절에 알았던 독일을 재발견했고, 저 “온유한 라인 강 분위기”를 다시 느꼈다.--- p.16

흐로닝언과 프리슬란트의 대조는 오멜란덴이 원래 프리시아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의해 더 나빠지기도 하고 더 좋아지기도 한다. 이러한 대조는 하위징아의 향토심에 유대감의 열기를 불어넣어 주는가 하면 상실의 향수를 안겨주기도 한다. 하위징아는 흐로닝언 대학의 교수가 된 후 이렇게 썼다. “블리에와 로베르스 사이에 사는 프리시아 사람들은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전의 땅을 그대로―혹은 일부를―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게르만 부족이다. 그들은 옛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카이사르의 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땅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소유와 상실은 서로 연결된 것이다. 중세 초기에 오멜란덴의 프리시아적 특성은 사라졌고, 하위징아는 이것을 문화적 상실이라고 말했다. 새로 이주해 온 색슨 부족은 프리시아 문화를 별로 채택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만의 문화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이들 지역은 그 고유의 대중문화에 건조하고 맥빠진 특성만 덧붙였다”라고 하위징아는 썼다. 그런 사실은 그를 울적하게 했다.--- p.24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은 서로 모순되었지만 중요한 것이었다. 이 두 영향력의 갈래는 하위징아의 유년 시절부터 대조의 틀을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평생 동안 하위징아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즉 과학 대 종교, 이성 대 감성, 개인 대 공동체, 변화와 영원 등이 하위징아의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개념들은 중고등학생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었지만, 하위징아는 그런 것들을 수면 아래에서 천천히 받아들였다. 이것은 그가 세례 받기로 결심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세례식을 통하여 18세의 요한은 할아버지의 종교 공동체에 합류했지만, 그가 세례식 후에 써놓은 신앙 확인서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계몽 정신을 보여 준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세례식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실망도 느꼈다. 손자의 신앙 확인서는 “종교와 도덕의 근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수와 메노파를 공손한 어조로 논의하고 있지만, “내(할아버지)가 막 시작하는 메노파 신자에게서 바라고 싶은 그런 신앙 확인은 완전 결여되어 있었다.” 한편 종교와 철학은 요한이 조부祖父로부터 물려받은 강렬한 열정을 완전히 해소시켜 주는 통로는 되지 못했다. 이 열정은 하위징아를 우울한 소년으로 만들었고 때때로 격심한 조울증 증세를 동반했다. 이렇게 만든 저변의 요인으로는 아버지의 질병(매독)이 아들들에게 전염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형 야콥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형이나 동생 요한이나 둘 다 한쪽 귀가 먹었는데 매독의 후유증으로 의심되었다. 특히 부친이 재취하면서 낳은 이복동생 헤르만은 이런 유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사진 현상액을 마셔 자살했다. 또 다른 요인도 있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일찍 아내를 잃었다. 야콥은 일곱 번째 아이를 낳은 후에 아내가 죽었고, 디르크는 결혼 4년 만에 아내와 사별했다. 할아버지는 죽은 아내를 이상화하면서 그 후 내내 혼자 살았고, 아버지는 아내와의 사별을 학문 연구로 완전 승화시켰다. 할아버지 야콥은 재혼할 의사가 아예 없었고, 죽은 아내가 그의 마음속에서 완전무결한 여인으로 각인되어 경건한 생활로 인도하는 완벽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디르크는 상처 후 2년 만에 재혼했고 시의원 선거에 입후보했고, 기초 과학에서 대중 과학으로 관심 분야를 전환했다. 할아버지는 하느님에게서 위안을 얻는 반면, 아버지는 계몽사상에서 인생의 활력을 얻었다. 어린 요한의 눈에 각인된 여성의 이미지는 성스러움과 부재不在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되었다. 요한은 여자를 천상에서 사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이런 여성의 이상화는 아버지의 질병이 성욕에 찍어놓은 재앙의 낙인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하위징아는 열정(구체적으로 성욕)과 그 성취(열정의 해소) 사이에서 아주 팽팽한 긴장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1897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욕정과 순결은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훌륭한 결혼, 모든 진실한 사랑은 이런 대조를 초월한다”는 문장을 노트에다 옮겨 적었다. 하위징아가 평범한 소년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운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재혼한 만나 데 콕은 훌륭한 아내였고, “아이들에게 비할 데 없는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준” 어머니였다. 한은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다. 그가 좋아하는 책은 역사적 모험소설과 동화였다. 이런 동화와 모험소설들은 그저 읽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하나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하위징아의 유년 시절은 일종의 오래 끄는 가면무도회 같은 것이었다.--- p.28

종교와 철학의 분야에서도 저 투명한 세월이 있었다. 하위징아는 그의 사촌 멘노 테르 브라크에게 1938년에 이런 글을 써서 보냈다. “나는 기독교의 어떤 특정 종파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의 도덕을 인간사의 최고 지배 원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걸어온 역사학의 길」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고대 인도의 세계는 내가 볼 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단테, 고딕 건축, 성 프란체스코로 대표되는 서양의 중세보다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이렇게 하여 하위징아의 시선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번쩍거리는 화려함에서 조용한 아름다움으로, 형태의 강조에서 단순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그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주관하는 자가 되었다. “나의 다섯 아이들이 태어나던 저 투명한 세월에, 나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바흐와 슈베르트의 음악 속에서 살았다. 그보다 애호하는 정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도 좋아했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시각적 예술을 좋아했다."--- p.38쪽

하위징아는 한 평생 시계처럼 정확한 삶을 살았다.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강의나 강연에 나가고, 저녁에는 각종 언어의 문법책을 읽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여 그는 십 수개의 언어를 터득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는 아주 잘했고,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러시아 어를 말할 수 있었으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올드 노스어, 산스크리트어, 아랍어는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그에게 사랑이 다시 찾아왔다. 하위징아가 혼자 산 지 20년이 되어가던 1937년의 일이었다. 암스테르담 상인의 딸이고 가톨릭 신자인 아우구스테 쇨빙크Auguste Scholvinck는 가정 관리자 겸 비서로 하위징아의 집에 와서 산다는 조건으로 입주했다. 당시 구스테(아우구스테의 애칭)는 젊고 상냥한 28세의 처녀였다. 그녀가 집에 온 지 2주가 지나자 하위징아는 그녀에게 운전사 겸 다른 일도 관리해 줄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또 착한 딸 겸 영원히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하여 65세의 노학자의 가슴에 새로 생긴 애인에 대한 열정의 불이 당겨졌다. 그가 나중에 써 보낸 편지들에서 발견되는 “나의 상냥하고 위대한 당신”, “나의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기” 등의 표현은 그런 열정을 잘 보여 준다.--- p.45

하위징아를 ‘클래식’ 작가로 만드는 것은 그의 저서 전편에 깃들어 있는 조화로운 균질성이다. 그의 저작에서 반드시 발견되는 일관성은 마치 그의 인생 전체에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물론 하위징아는 발전의 여러 단계를 거쳐 갔다. 정치적으로 그는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자유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심미적 경향은 서서히 윤리적 경향으로 대체되었으며, 종교적 터전에 대한 추구는 마침내 그가 말한 “이 세상에서 기쁨을 취하기”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하위징아의 인생에는 발전이라는 것이 없었다. 적어도 직선적 의미의 발전은 없었다는 얘기다. 발전보다는 ‘번데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좋다. 이것은 하위징아가 아주 존경했던 문화사가인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가 제시한 비유였다. “역사는 내가 볼 때 가장 높은 의미의 시詩이다.” 부르크하르트는 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시절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그것을 일련의 번데기 과정이라고 보며 인간의 정신이 거듭하여 새롭게 계시되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여기 세상의 가장자리에 머물면서 모든 사물의 원천을 향하여 양팔을 내뻗는다. 이 때문에 나에게 역사는 순수시이며, 우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 -48쪽

하위징아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원만한 변증법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중세의 가을』은 원래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반에이크Van Eyck 형제의 미술을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에이크 형제의 리얼리즘, 모든 세부사항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리는 태도를 새로운 어떤 것, 르네상스의 전조라고 해석했다. 하위징아 또한 그런 리얼리즘을 눈여겨보았으나 그건 테크닉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내용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반에이크 형제의 예술은 중세 후기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반에이크의 예술에 이르러, 성스러운 사물에 집중하던 회화는 세부를 묘사하는 자연주의의 단계로 올라섰다. 엄밀한 미술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자연주의의 시초이지만, 문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 후기의 결말을 의미한다.”--- p.53

하위징아가 미국에 대하여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 나라 국민의 “엄청난 생활 의지”였다. 그들은 “이 세상과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에 집중하는 국민”이었다. 이에 비해 유럽은 죽은 문화와 낡은 영웅들에 너무 몰두했다. 그렇다고 해서 너새니얼 호손이 단테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하위징아는 미국의 원시적 종교성과 순진한 감상성에서 중세의 공동체적 정신을 발견했다. 사실을 털어놓고 말하자면, 미국의 “시장”은 이탈리아의 중세 도시의 포데스타podesta(도시 행정관)와 무엇이 다른가? 미국의 “산업 자본이 만들어낸 주식회사”와 중세 유럽의 “영주와 봉건제” 사이에는 현저한 유사점이 있지 않은가? 미국의 클럽이나 협회의 형성은 유럽의 종교 단체의 형성과 비슷하지 않은가? 세상을 달빛 속에 잠긴 한적한 대성당(“세상은 많은 상징의 관념들로 지어진 대성당”)으로 인식하는 중세 후기의 사상과, 현대인이 “물질과 사회적 테크놀로지의 완벽한 수단”에 속절없는 노예가 되었다는 사상 사이에는 고통스러운 유사점이 있지 아니한가?--- p.55

1938년에 『호모 루덴스』가 출간되었다. 역사가 하위징아는 일반 문명사의 언저리에서 파악되는 문헌학적 탐구사항들을 놓치지 않았다. 이 책은 동양과 서양에서 발견되는 문화적 공통분모, 원시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문화의 발전 단계를 탐구한다. 모든 문화에는 놀이가 선행한다는 점에서, 문화의 핵심은 놀이에서 파악될 수 있다고 본다. 문화는 놀이로서, 또 놀이 속에서 탄생한다. 동시에 이 책은 『내일의 그림자 속에서』의 서곡으로 읽어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위징아는 현대가 놀이의 존재 이유를 취소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호모 루덴스』는 그의 저작들에서 등장하는 모든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중세와 현대의 문화?역사적 연구의 맥락과 틀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예전에 다루었던 언어학적 작업을 다시 꺼내들고 있다. 언어와 문화를 통합된 전체로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언어학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p.58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위징아가 바라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무엇보다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 했다. 12세기야말로 또 다른 보다 매혹적인 르네상스의 시기였다. 1930년대 후반에 그는 『중세의 가을』과 한 짝을 이루는 저서를 쓰기 위해 12세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 저서는 중세 후기의 무겁고 어두운 시대에 대비되는 12세기의 가볍고 반짝거리는 시대상을 보여 주는 책이 될 터였다. 하위징아는 1935년 아벨라르 논문에서 “12세기는 그 어떤 시대보다 창조적이고 획기적인 시기였다”고 적었다. 바로 이 시기에 서구의 기독교 문명은 결정적 형식을 구축했다. 각성이나 개화 같은 단어는 15세기의 르네상스보다는 12세기의 르네상스에 더 잘 적용된다. 그것은 발랄한 흥분, 혼란, 불안정이 공존하는 위대한 시기였고 위대한 창조성의 시대였다. 하위징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그 시대에서 발견했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모든 것이 이 시대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시대와 한번 비교해 볼 것을 유혹했다. 소생과 영감이라는 인간의 의식이 아주 모범적으로 활짝 피어난 시대, 그것이 12세기였다.--- p.63

하위징아가 12세기를 경쟁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은 1915년 레이던 대학 교수 취임 강연, “인생의 역사적 이상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인간이 과거 속에 투영한 어떤 뛰어난 업적을 지칭하면서 “인생의 역사적 이상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과거의 완벽함을 보여 주는 첫 번째 이상적 사례는 황금시대의 개념이다. 또 다른 이상적 사례는 복음주의적 가난이다. 이것은 특별히 12세기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복음주의적 사례는 실제적 존재의 차원을 획득하지 않으면 실천적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모습과 역사적(실제로 존재한) 모습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12세기 전에는 강조되지 않았다.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예수와 부유한 젊은이의 비유가 경쟁의 스토리로 등장했고, 비로소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이 구체적 명령이 되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복음 19장 21절) “성 베르나르에 의해 각성된 예수 가르침의 실천은 르네상스였다. 그리고 3세기 뒤인 15세기에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가 성 베르나르St Bernard의 사례를 들면서 그것을 다시 가르친 경우는 르네상스의 르네상스였다.”--- p.65

인생의 중년을 훨씬 지난 시점인 1932년에 하위징아는 독서에 관한 에세이를 한 편 썼다. 그는 특유의 대조를 내세우며, 책들은 “친구이며 적이다”라고 말했다. 현존하는 책들은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적이다. 하지만 이런 풍성함이 선택의 자유를 가져다준다. “읽기(lezen)는 그 어원에 있어서나 행위의 성질에 있어서 선택하기, 골라내기, 수집하기, 뽑아내기이다. 자유 의지를 잘 드러내는 행위를 든다면 읽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하위징아는 역사 쓰기(역사에 관해 저술하기)도 읽기, 수집하기 혹은 야생화를 따기라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 겸 수집하는 사람의 자유는 곧 역사의 열린 맥락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꽃은 꽃다발 전체의 외양을 바꾸어 놓는다. 읽기는 쓰기와 마찬가지로 창조적 행위이다. 만약 어떤 작가가 독자에게 어떤 다른 리얼리티를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 독자 자신의 성취이다. 그 리얼리티는 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 뒤에 있다. “독자는 저자의 부름에 반응하여 저자를 길의 중간쯤에서 만나는 것이다.”--- p.74

하위징아는 어릴 적에 동화를 좋아했고 이 취미를 평생 유지했다. 그는 특히 한스 안데르센Hans Andersen을 좋아했다. “내가 걸어온 역사학의 길”이라는 짧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릴 적에 동화를 좋아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좋아한다. 특히 간단한 동화를 가장 좋아하는데 안데르센의 「오래된 집」, 「도깨비와 야채상」을 사랑한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에 안데르센의 달[月] 관련 동화들 중 하나를 주제로 학생회에 나가 연설을 했다. 하를렘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시절에도, 잠들기 전에 안데르센의 동화를 한 편씩 읽곤 했다.--- p.76

읽기를 중시하는 하위징아의 태도는 그의 모든 저서 갈피갈피에서 발견된다. 그는 역사적 현실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하여 종종 문학의 도움을 요청한다. 레이던 대학 교수 취임 연설에서 그는 말했다. “역사가는 과거의 다양한 모습을 탐구하지만, 그 과거를 좀 더 생생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과거의 회화繪畵를 보아야 하고 과거의 문학을 읽어야 한다.” 고대 인도 드라마의 문학적 의미를 논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는 이미 고대 인도 드라마를 “셰익스피어 당시의 영국 희곡”과 비교할 생각을 했다. 레이던 취임 연설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인들을 자문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 우리에게 장엄함의 본질을 정의해 주도록 하자.”--- p.80

하위징아는 역사에 깊이를 주기 위해 또 대조를 부여하기 위해 문학을 활용했다. 그는 역사에서 발견한 대조를 의인화하기에 적절한 작가들을 찾아 나섰다. 이에 대한 좋은 사례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제롬이다. 하위징아는 이 두 인물을 서로 대비시킨다. “이들은 서로 갈등하는 두 타입의 지성이다.” 이런 서로 다른 “종교적 기질”을 대비시킴으로써, 하위징아는 기독교 사상의 발전을 좀 더 확고하게 파악한다. “제롬은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문화의 결과물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은둔주의를 지킨 인물이었다. 가령 문학, 개인적 동정의 관계, 개화된 사상, 여성적 사상의 형태, 양육의 필요성 등 문화적 요소 등에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그래도 내적으로는 세련된 인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도 그를 잘 알겠지만, 불타는 가슴과 절대적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위징아는 에라스뮈스 전기에서도 같은 패턴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에라스뮈스와 루터를 대비시켰다. “에라스뮈스는 뉘앙스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개념들이 끊임없이 조정되고 변화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그를 프로테우스라고 불렀다. 반면에 루터는 모든 사물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네덜란드인(에라스뮈스)은 혼란스러운 물결을 관찰하는 반면 독일인(루터)은 산꼭대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위징아가 제롬과 에라스뮈스를 서로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열정을 제시하지 않으면 글을 써나갈 수 없었다.--- p.83

『중세의 가을』에서 하위징아는 이런 확신을,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프랑스 문학의 경우처럼 “상징주의”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19세기 프랑스 문학과 15세기 영국 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 두 경우에, 실제와 이상 사이의 대비가 핵심적 요소이다. 모순이 조화롭게 용해되어 모든 것이 관계를 맺게 된다, 라는 잘 정돈된 코스모스(세상)의 전제를 받아들임으로써, 두 나라의 문학은 이런 대조를 극복한다. 이러한 관계(대조되는 사물들이 조화되어 있는 관계)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보다는, 의미와 목적을 중시한다. 모든 사물은 의미를 갖고 있고 그것(의미)은 세상의 질서에 기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분은 전체를 반영한다. 이것은 중세의 상상력을 떠받치는 근본적 원칙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와 낭만주의의 원칙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 장엄한 스타일은 전체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낭만주의의 스타일 부재는 세부사항에 바탕을 둔 것이다. 르네상스는 형식을, 낭만주의는 실제를 중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위징아는 두 가지 이유로 독서를 한다. 첫째, 그는 시대, 패션, 유행, 외양의 종합에 익숙해지기 위해 독서를 한다. 그런 시대, 패션, 유행, 외양의 배후에서 동시대인들은 그들의 씁쓸한 현실을 은폐하거나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문학은 현실을 미화함으로써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획득하고 동시에 그 시대의 정신을 밝혀 준다. 둘째, 이런 형식, 세련됨(maniera), 스타일 뒤에는 여전히 어떤 실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이 비양식화의 실제(non-stylized realtiy)가 독서의 이유가 된다. 이 때문에 스타일이 무엇인지 잘 아는 하위징아는 스타일 없는 어떤 것을 찾아 나선다. 베르메르Vermeer가 아무리 그 당시의 네덜란드 화단의 주류로부터 벗어나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네덜란드 화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주장, 아무런 사상, 그 어떤 특정한 스타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위징아는 구체적으로 미국 문학의 그런 경향(스타일 없는 스타일), 그리고 전반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그런 경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p.89

하위징아는 단테를 가리켜 가장 감동적인 독서 체험이라고 했지만, 정작 단테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써놓은 게 없다. 그렇지만 단테 읽기에서, “애향심” 등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이끌어냈다. “단테처럼 자신의 고향과 국가에 대하여 깊은 유대감을 느끼는 시인도 없다.” 하위징아는 1921년 단테의 해에 그렇게 썼다. “그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심지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보다 더 강력한 애향심을 풍긴다. 피렌체, 베로나, 라벤나의 거리를 걸으면 단테가 저절로 생각나는데, 다른 시인들의 거리를 걸을 때 과연 이런 느낌이 들까? 이탈리아는 그 외에 일천 가지의 이유들로 이 세상의 즐거움이다.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는 다른 많은 이탈리아의 정신으로부터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정신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깊이 있는 부분은 단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하위징아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단테의 리얼리즘이었다. “그 리얼리즘은 강력한 일관성을 갖고 있고 아주 힘차고 생생하고 환상적이다. 그리하여 단테의 작품은 문학적 리얼리즘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여기서 하위징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이론을 기독교적 경쟁의 이론으로 심화시킨다.--- p.92

풍경, 사람, 사실 등은 시가 아니어도 때때로 시정을 풍긴다. 하위징아는 역사를 하나의 시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문학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역사학에 별 관심이 없었고 언어를 무엇보다 중시했다. 그는 언어를 시적 정서가 풍부한 천연자원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하위징아 저서의 통일성을 그의 주된 특징으로 읽어야 한다. 물론 하위징아는 여러 발전 과정을 거쳐 갔고 여러 해에 걸쳐 그의 스타일을 수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위징아 전기가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그 형식(스타일)의 지속적 성격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위징아를 시인으로 다루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의 서정시를 자주 흥얼거렸다. “우리들의 내부에는 젊고 힘찬 시인이 언제나 잠자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자주 생각하십시오.” 그의 논문들, 전기들, 연구서, 에세이 등은 모두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이루는데, 그 속에서 스타일은 기계적 조종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詩的 과정으로 작동한다.--- p.96

하위징아의 문장은 표현적이면서도 명료하다. 그는 『내일의 그림자 속에서』에서 이렇게 썼다. “소유권을 만들어내는 것은 울타리이지, 소유자가 울타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중세의 결혼 초야에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에로티시즘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오로지 현대의 개인적 감수성만이 이런 공개적 과시를 완전히 철폐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결혼 당사자 두 사람에게만 속한 것(섹스)을 호젓함과 어둠 속에 감추어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중세의 가을』에는 이런 멋진 문장들이 넘쳐난다. 가령 그는 중세의 결혼 축제에서 터져나오는 음란한 농담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 뻔뻔스러운 웃음과 남근적男根的 상징 등 축혼 의식의 소도구들은 결혼 축제라는 성스러운 의식에서 필수적인 한 부분이었다. 결혼의 성적 결합과 결혼 의식은 한때 불가분의 것이었다. 그것은 남녀 간의 성적 결합에 집중하는 하나의 거대한 신비였다.” 반면에 여성이 느끼는 사랑의 그림은 “베일에 감추어진” 것 혹은 “좀 더 오묘하고 깊은 비밀”이라고 묘사했다. 대중적 신앙의 “성스러운 도움꾼들”은 “신성의 대리인”으로 묘사되었다. 대중들이 성사를 대하는 태도와 영성체를 바라보는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갈구하는 양팔을 하늘로 내뻗어 하늘을 땅쪽으로 끌어당겼다.” 불꽃 모양의 고딕 양식은 “끝이 없는 오르간의 코다”로 묘사되었다. 바흐 음악의 가사 작사자는 “류마티스에 걸린 교회 신앙을 가진, 지방색 강한 3류 시인”으로 평가 절하되었다. 아주 과감한 서술이지만 이보다 더한 것도 있다. “정통성과 양식화는 서로 가까운 친척이다.”--- p.115

하위징아가 대조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건들을 극적인 구도 속으로 엮어 넣음으로써 역사는 일관되게 인식될 수 있다.” 문화적 현상은 “지속적인 대립 사항들의 균형 속에서 정의되어야 하고 그래야 올바르게 이해된다.” 하위징아는 이러한 대비를 극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윤리적 효과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극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사람들은 상호 이해가 배제되는 양극단의 것, 가령 보수주의자들의 뒤늦음과 혁신주의자들의 오만함에서 아주 비극적인 대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윤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사람들은 죽었지만 아름다운 것에 대한 존경심과 젊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공유한다. 관찰자가 일단 어느 한 편을 들면, 그 대립은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사이의 우주적 투쟁의 에피소드로 자리 잡는다.”--- p.119

대조는 『중세의 가을』에 보다 폭넓은 통일성과 단단한 일관성을 부여해 준다. 비록 하위징아가 제1장에서 삶의 조화로운 잠재력을 언급했지만, 그가 실제로 그려내는 그림은 악의 세계이다. “증오와 폭력의 불길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악은 강력하다. 악은 그 검은 날개로 이미 어두워진 대지를 덮는다.” 그렇지만 그 가혹한 현실은 제2장에서 “아름다운 삶에 대한 동경”으로 균형을 잡는다. 바로 이런 양극단의 대비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가 된다. 그는 인생과 예술 사이의 대비를 주제로 삼는다.--- p.121

에라스뮈스 전기의 핵심 부분은 시대의 거울인 에라스뮈스가 시대의 변화 촉매제인 에라스뮈스로 전환하는 분수령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하위징아는 자신의 진정한 초상화를 드러낸다. 바로 여기서 하위징아는 에라스뮈스의 부정적인 측면, 가령 통찰력 부족, 경건성 부족, 깊이의 부족을 그의 긍정적 측면 가령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충동, 단순명료함과 자연스러움의 재주, 순수함과 이성 등과 대비시킨다. 하위징아는 이렇게 하여 성실하면서도 솔직한 사람, 경험이 없고 비非 세속적인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그는 보다 깊은 측면도 갖고 있었는데, 그건 이런 특징들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을 에라스뮈스 자신은 알지 못했는데, 그가 알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측면은 에라스뮈스라는 존재의 핵심이 되는 또 다른 측면을 감추었는데, 그 핵심은 정말로 선량한 것이었다.” 하위징아는 책의 후반부에서 에라스뮈스와 루터의 차이를 주로 논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대비인 “시시한” 에라스뮈스와 “위대한” 에라스뮈스의 대비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하위징아는 이렇게 말한다. “시시한 에라스뮈스가 허용하는 만큼 위대한 에라스뮈스를 많이 살펴보도록 하자.”--- p.126

문화적으로도 네덜란드 공화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크게 달랐다. 인근의 국가들은 르네상스와는 뚜렷하게 다른 바로크 시대를 구가했다. “17세기는 16세기와는 다르게 엄격하고 배타적인 원칙, 간결한 선과 형태, 지나친 장식의 억제 등을 지향했다. 이렇게 한 것은 전반적 통일성과 위압적인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위징아는 이렇게 보았다. 바로크의 규범은 “확립된 기준에 순응하는 것이 바탕이었다. 그것이 교리든 통치든, 형태론이든 작시법作詩法이든 다 마찬가지였다. 화려함과 위엄, 연극적 제스처, 엄격한 규칙과 요지부동의 교리 등이 강조되었다. 교회와 국가에 대한 성실한 복종이 처신의 이상이었다. 정부 형태로는 군주제가 신격화되었고 개개 국가는 무제한적인 국가 이기주의와 자기 의지라는 근본 원칙을 고수했다. 공공 생활은 장엄한 수사법의 형태로 영위되면서 엄숙한 진지함을 강조했다. 위엄과 행렬과 과장된 관습이 판을 치는 시대였다.” 이러한 규범은 교황이 다스리는 이탈리아, 윌리엄 로드William Laud와 왕당파(Cavaliers)가 행세하던 잉글랜드, 위대한 세기(grand siecle)을 지향하던 프랑스 등에 그대로 적용되었으나, 17세기의 네덜란드 문명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p.129

『호모 루덴스』는 다른 책들에 비해 덜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지만, 대조라는 동일한 원칙을 축으로 집필되어 있다. 하위징아가 볼 때, 놀이의 핵심은 대조이다. 그는 대조라는 방법론을 적용하여 놀이를 “현실과는 다른 것” 혹은 진지하지 않음으로 정의한다. 이어 그는 놀이/놀이 아님을 다른 중요한 대립항들, 가령 지혜/우둔, 진실/허위, 선량/사악 등과 나란히 놓으면서, 놀이는 완전히 다른 자율적인 것,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범주라고 말한다. 그래서 문화의 요람은 곧 대조라고 주장한다. 놀이가 문화에 선행했고 문화는 놀이 속에서 태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는 고대 문화의 공동체 생활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 생활은 “공동체 그 자체의 대립적이고 길항적인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원시 부족을 두 개의 라이벌 씨족으로 갈라놓은 원시적 이원론, 음/양의 대립 등은 놀이에 카니발적인 분위기를 불어넣는 기본적 모델이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개념을 언어학적, 추상적으로 분석한 후에 아프리카, 근동과 극동, 아메리카 등의 초창기 문화적 발현물들을 검토한다. 이런 곳들에서 놀이는 의식儀式과 경쟁의 형태를 취했다. 이런 점에서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포틀래치 제도나 로마의 루디ludi나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라틴어에서 루디는 놀이의 형태를 취하는 신성한 경쟁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런 문화적 요소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 로마의 게임들에서 하위징아는 하나의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즉 그가 『중세의 가을』에서 좀 더 개괄적으로 설명한 놀이의 메커니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문화가 더 복잡해질수록 그 자원들은 더 세련되고 문화적 결과물들은 놀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문화가 점점 더 진지해질수록 놀이에게는 주변적인 공간밖에 남지 않는다.”--- p.130

모더니티의 이런 급격한 반전은 정확하게 언제 벌어졌는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전에는 아주 유기적이었던 것이 황당무계하게도 기계적인 것이 되어 버렸나? 하위징아는 이 문제를 아주 초창기 단계에서부터 다루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주 긴급한 문제라고 보아 반복적으로 다루었다. 『호모 루덴스』에서는 19세기의 분수령을 정의했지만, 『중세의 가을』에서는 그보다 훨씬 이른 시점을 제시했다. 『중세의 가을』에서 하위징아가 결정해야 할 것은 놀이와 진지함, 지식과 존재 사이의 관계 등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인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더니티의 반전反轉은 르네상스와 근대 사이의 어떤 시점에서 발생한 게 분명했다. “예술과 생활이 구분되고, 예술이 삶의 즐거움 중 고상한 부분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들이 생활 한 가운데에서 더 이상 예술을 즐기지 아니할 때 흐름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예술은 이제 고상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교육과 휴식을 위해서만 예술을 쳐다보게 되었다. 하느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구분시키는 저 오래된 2원론이 다른 형태로 되살아나, 인생과 예술을 구분시켰다. 인생의 즐거움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지고 즐거움은 다시 고상한 즐거움과 저급한 즐거움으로 양분되었다.”--- p.133

대조는 아리스토텔레스 용어를 빌어서 말해 보자면 하위징아 상상력의 제1 운동자運動者였다. 하지만 그 해소, 즉 조화에 대한 추구는 제2 운동자라 할 수 있다. 대조는 긴장과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반면, 조화는 균형과 안정을 의미한다. 균형은 하위징아의 방법론적 접근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규범적인가 하면 서술적인 것이고, 학문과 문화 양쪽에 적용되는 것이다. 젊은 언어학자로서, 하위징아는 언어를 연구할 때 일방적이고 합리적인 접근 방식에 반대했다. 역사학자로서는 경제적이고 수량적인 역사의 일방적 강조를 반대했으며, 문화비평가로서는 문화를 일방적이고 물질적인 발전으로 보기를 거부했다. 하위징아의 세계관 속에서, 언어의 창조는 실용적 결정이라기보다 시적 충동이었고, 역사학은 회계 장부가 아니라 창조적 과정이었으며, 문화는 영혼 없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의미 깊은 의식儀式이었다. 하위징아는 전 생애를 통하여 예술의 힘과 과학의 힘을 서로 분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가 볼 때, 역사가의 책무는 “가장 엄정한 객관성”과 “가장 주관적인 정서”를 종합하는 것이었다.--- p.138

하위징아는 한평생 낭만주의와 씨름했다. 그가 싫어했던 민족주의와 그가 사랑했던 역사가 모두 낭만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낭만주의와 “좋은” 낭만주의를 구분하려 했다. 그는 가짜-신비주의와 점잖은 서정주의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 피와 땅의 허울 좋은 수사修辭를 강조하는 민족주의와, 민족의 형제애와 초超 민족적 존경심을 바탕으로 하는 형제애를 구분했다. 미덕을 경멸하는 낭만주의가 있는가 하면 미덕을 경배하는 낭만주의가 있었다. 아주 진지하게 문학의 놀이를 펼치는 낭만주의가 있는가 하면 문학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여 놀이 정신을 죽이는 낭만주의도 있었다. 낭만주의의 문제이면서 매력인 점은 사람의 현실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 너머에 있는 듯한 무엇”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전에는 날카로운 윤곽을 갖고 있었던 것이 낭만주의의 눈으로 보며 흐릿한 윤곽을 갖는다. “우리의 시선은 오래된 개념들의 경계선들 사이에서 멈추고, 거기에서는 기이한 분위기가 생겨난다. 그 속에서는 사물들이 즐거운 불일치의 무심함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이런 분위기에서는) 이미지들이 개념들을 대신하고, 정의定義는 “무드”에 의해 대체된다.--- p.139

『호모 루덴스』는 하위징아가 무드와 예식이라는 용어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시각은 그의 나머지 저서들에서도 나타난다. 『중세의 가을』첫 페이지에서 그는 중세 후기 생활의 의례적 측면과 “과시적이고 공공적인 성격”을 묘사한다. “심지어 문둥이들도 그들의 딸랑이를 딸랑딸랑 흔들어대고 행렬을 이루어 지나감으로써 그들의 질병을 공개적으로 전시했다. 모든 신분, 지위, 조합은 그 의복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과시용 무기를 들고 제복을 입은 종복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는 귀족들은 경외와 선망을 불러일으켰다. 법정의 선고, 물품의 판매, 결혼식과 장례식 등은 행렬, 고함소리, 탄식 소리, 음악 속에서 이루어졌다. 남자 애인은 여자 애인의 기장記章을, 조합원은 형제조합의 휘장徽章을, 당파는 영주의 깃발과 문장紋章을 높이 쳐들었다.”--- p.149

하위징아는 열정을 역사의 감각 기관器官이라고 생각했다. 엄정한 인식론과 객관적 학문 정신을 숭상해 온 현대의 독자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약간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하위징아의 생각하기와 글쓰기는 다른 문학적 전통에서 생겨났다. 그는 흐로닝언 대학 교수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가 가설을 세우고 시인이 운율과 각운을 고안하기 훨씬 이전에, 이들의 마음은 내적 기질에 의해 통합되어 있었다.” 그 연설 제목은 “역사적 설명의 미학적 요소”였는데, 그는 인식론적인 문제보다 심리적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우리가 너무나 순종적이고 또 인간 중심적이기 때문에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우리가 어떻게 지나간 세기들의 열정, 즉 “야만적인 자부심, 신적인 권리에 대한 양보, 예속과 충성심을 강조하는 중세 사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하위징아는 역사가들에게 바로 그것을 요구했다. 역사가라면 “지나간 세대들의 완고한 편견”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반에이크와 렘브란트, 로코코와 밀레를 동시에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디드로를 만나면 합리주의자가 되고, 거지들을 만나면 칼뱅주의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p.163

열정과 형식의 결합이라는 화두는 하위징아의 모든 저작에 나타난다. 『미국의 개인과 대중』에서 하위징아는 미국 생활의 열정을 추적하여 황무지의 원시적인 삶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시에 그는 열정과 형식―미국의 경우는 개인주의와 관습주의―의 대조를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마치 황무지가 개인의 개성을 일깨우고 도시의 생활이 군거 본능을 일깨우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즉발적인 강렬함이 대규모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그런 경향은 황무지 생활에 의해 강화된다. 극단적인 소요와 안정적인 규약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상은 『호모 루덴스』에서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가다듬어져 있다. 『호모 루덴스』는 문화를 양식화된 열정, 조화 속으로 침잠된 열정으로 규정한다. 간단히 말해서 놀이는 열정이다. “왜 도박사는 도박에 몰두하는가? 왜 많은 관중은 축구 경기를 보면서 열광하는가?” 생물학적 분석으로는 이런 놀이의 열광과 몰두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열광, 몰두, 광분 등에 놀이의 본질 혹은 원초적 특징이다.”--- p.168

하위징아는 예술을 인생의 거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예술이 삶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삶의 필수적 부분일 때에만 타당한 것이다. 만약 그 둘이 서로 떨어져 있거나, 예술이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 전망은 왜곡될 것이다. 가령 중세 생활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 중 “밝은 면”은 보존된 것이 별로 없다.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이렇게 썼다. “15세기의 즐거운 온유함과 영혼의 평온함은 회화 속에만 표현되고 또 고상한 음악의 투명함 속에서만 결정結晶된 듯하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예술의 세계를 제외하고 어둠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잘못된 그림”을 교정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시대의 비현실적 예술을 삶의 맥락 속으로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는 연대기 작가의 말을 회가의 이미지와 비교했다.--- p.193

여러 가지 이유로 하위징아는 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연과학이 학문의 모델인 시대에 역사학자가 되었다. 역사학 또한 이 모델을 따를 것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하위징아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볼 때, 역사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무게를 달 수 없는 물건을 저울 위에 올려놓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뉘앙스는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맛을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위징아는 동료 역사학자들보다 역사학의 창조적 측면을 더 강조했다. 하위징아가 볼 때 역사는 변모를 다루는 학문이었고, 그 변모는 “마음속 그림들의 저수지가 다른 그림들의 저수지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 기술記述은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발휘이며, 생생한 현실 인식을 이미지로 바꾸어놓는 창조적 행위이다.--- p.206

하위징아는 어떤 국가에 소속된 느낌이 그 어떤 인간 정서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린 주관성의 한 형태였다. 만약 자신의 조국이 위험하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희생되어야 한다. 그것은 정서의 한 가지 측면이다. 거기에는 다른 보완적 측면이 있는데 다른 나라들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그가 사랑했던 외국의 그림을 마음속에 환기해 보라고 촉구한다. “당신의 명상 속에서, 당신은 그 외국의 모든 보물들을 혼합하여 하나의 단일한 비전을 구축한다. 당신은 그 예술의 아름다움과 그 생활 방식의 강력한 양상들을 분간한다. 당신은 그 나라 역사의 우여곡절과 매혹적인 풍경을 체험한다. 당신은 그 나라의 지혜로운 격언을 듣고 그 나라에서 만들어진 불후의 음악의 가락을 듣는다. 당신은 그 나라 언어의 투명함과 사상의 깊이를 완벽하게 체험한다. 또 그 나라의 와인을 맛보고 그 나라의 용기, 힘, 생명력과 하나 됨을 느낀다.”--- p.207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아 행한 레이던 대학 취임 연설에서, 하위징아는 삶의 역사적 이상들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어떤 길들이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내놓은 대답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그의 연구방법과 실천, 그의 역사관, 그의 문화비평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네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중 세 가지는 도피주의의 형식이었다. 첫째는 “고대의 아름다움과 지혜”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아시리아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이었다. 셋째는 문화란 결국 죽음에 대한 준비라는 불가피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전쟁의 비참함과 많은 것들이 파괴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네 번째 길이 있었다. “그것은 과감하게 행동하는 길이다. 전선의 참호 속에든 그 어떤 종류의 진지한 일이든.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것은 인생의 모든 교리의 시작이요 끝이다. 문화의 포기가 아니라 자아의 포기 속에서 해방이 얻어질 수 있다.”--- p.225

하위징아가 어느 의미에서 신비주의자가 된 것은 자연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였다. 그의 짧은 자서전에서 하위징아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의 인상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적었다. “청소년 시절 이전에도 자연을 보고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은 언어의 매개가 없이도 서정적-감정적 황홀로 전환되었다.” “나는 20대 후반까지 철저한 공상가요 몽상가였다”라고 그는 적었다. 동료 대학생들이 실험실 세션에 몰두하는 오후 시간에 그는 혼자서 마을 밖으로 산책을 나갔고 늦은 오후 술 마시는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산책길에서 그는 가끔씩 “일종의 몽환에 빠져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구체적인 어떤 것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은 일상생활의 경계 바깥으로 나가서 일종의 천상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반응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은 곧 스러지고 나는 대낮의 환한 빛으로 돌아왔다.”--- p.231

하위징아의 저서는 자연에 대한 연상들로 가득 차 있다. 식물과 곤충, 바람과 비가 많이 등장한다. 가령 아벨라르 관련 논문에서 “꽃피다”라는 단어가 한 페이지에서 네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앞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것은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상투어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실제로는 강렬한 체험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위징아가 중세의 전원시와 관련하여 “햇빛 환한 꿈나라가 아지랑이 같은 플루트 음악과 새 소리 속에다 욕망을 감춘다”라고 썼을 때, 그 꿈나라는―이것은 중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위징아 자신에게도 해당한다―“태양과 여름, 그늘과 신선한 물, 꽃과 새들에 대한 직접적인 즐거움으로부터 나온다.”--- p.235

역사의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 대한 하위징아의 관찰은 결코 체계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존재 가능한 형식들은 그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그는 『중세의 가을』에서 이렇게 썼다. “그 어떤 시대가 되었든 사랑의 이상이 그 외피로 내세울 수 있는 형식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 시대의 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 볼 수 있다. 하위징아는 중세 후기의 귀족 생활을 꿈을 연출하려는 시도라고 보았다. “프랑스든 부르고뉴든 피렌체든 중세 후기의 귀족 생활은 꿈을 연출하려는 시도였다. 그 꿈은 예전과 똑같은 꿈이었다. 오래 전의 영웅들과 현자들의 꿈, 기사와 시녀의 꿈, 심플하면서도 흥미로운 목동들의 꿈이었다.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오래된 스타일로 그 곡조를 연주했고 피렌체는 오래된 주제에 새롭고 좀 더 아름다운 변주를 가미했다는 것만이 다른 점이었다.”--- p.270

과학적 연구에 잘 반응하는 정서의 요소들만 강조함으로써, 현대 심리학은 열정을 단순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열정의 도덕적 의미도 박탈했다. 공식 사료를 강조함으로써 현대 역사학도 똑같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하위징아에게 역사는 “행동하는 도덕”이었다. 『부서진 세계』에서 그는 죄악과 미덕을 논의하면서 이렇게 썼다. “나의 말을 비웃지 말기 바란다. ‘이 낯익고 오래된 추상 개념들,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개념적 세계에서 나온 이런 일반적 개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런 개념들을 대신하여 우리는 오늘날 심리학이라는 학문만 갖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지난 40년 동안 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나는 그런 믿음을 그 동안 여러 번 표명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일곱 개로 치든 여덟 개로 치든 미덕과 악덕의 세트들은 가장 중요한 개념적 도구이다. 이것은 2천 년 전이든 오늘날이든 동일하다. 인간의 정서적 생활과 도덕적 규범에 관한 모든 것을 탐구하자면 이런 세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p.285

위대함이 너무 장대하고, 영웅주의가 너무 연극적이고, 천재가 너무 문학적이라고 해도 이 세 가지 특징은 인간적 위대함의 전모를 모두 포섭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성스러움이 남게 된다. 그리고 보라. 여기에 남과 여의 완강한 구분이 저절로 해소되어 버린 사례가 있다. 여기에는 음과 양의 구분이 없다. 탁월함과 수량 사이의 구분 또한 해소되었다. 성스러움을 잴 수 있는 지상의 척도는 없다…… “진정한 위대함”은 부르크하르트 생각처럼 하나의 신비가 아니라 하나의 단어, 역사가 부여한 사후死後의 기사도적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떤 개인도 그의 조국만큼 위대할 수는 없다. 가끔 진정한 위인의 업적은 조국이라는 광대무변한 공간의 이미지로 가장 잘 묘사된다. 위대함의 본질은 그런 단어, 그런 질서를 뛰어넘는 곳에 있는 것이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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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자들을 유혹하여 하나의 마법적 여행을 떠나게 한다. 20세기의 저명한 고전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를 쓴 역사가의 철학과 사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위징아의 주변 상황과 특성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20세기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 역사가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오터스페어는 아주 쉽고 우아한 문장으로 그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많은 모순적인 세부 사항들을 세세히 읽어내어 절묘하게 조합함으로써 하위징아의 초상화를 멋지게 제시한다. 이 책은 통상적인 전기를 쓰려는 것도 아니고 역사학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노리는가? 그것은 규정하기 어려운 본질을 포착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위징아의 위대한 글쓰기는 어디에서 나오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기에 그토록 지속적인 매력을 발산하는가? 바로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얀 지올코브스키 (하버드 대학 중세 라틴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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