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의 진실까지 밝히지 않으면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 아니다. …… 그렇지만 제5공화국 시절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지 않던 자가 훈장을 받고, 포상금을 나누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진급하고, 지금은 정년퇴직해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피해자와 그 가족은 인생이 파괴되고, 고문 후유증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주위의 눈총까지 받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결코 과거사 청산을 말할 수 없다. ---「개정판 머리말」 중에서
“설사 일본에 있어도 김일성과 김일성을 지지하는 자를 철두철미하게 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심이다.”
고병천이 말했다. 몇 십 년 동안 본국 국민과 재외 한국인을 벌벌 떨게 한 논리였다. 그 논리는 마치 어린아이가 출입 금지된 잔디밭에 들어갔다고 해서 사형을 선고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반공법, 오늘날 국가보안법은 고병천의 저 말을 근거로 삼아 존재한다. 그러나 본국 정부는 우리 재일 한국인 2세와 3세에게 왜 김일성을 적으로 삼고 반공을 국시로 해야 하는지 말해준 적 있는가? 무엇이 죄인지 말해준 적 있는가? 자유로운 사고에 익숙한 우리는 분단에 따른 반목을 민족 전체의 비극으로 파악하고 민족 화해의 이정표가 마련되기를 갈망했다. 반김일성주의자라고 했지만, 남북이라는 말로 분단을 추상화하고 추상화한 북을 적으로 믿는 태도를 나는 더욱 반대한다.--- pp. 60~61
어떤 재일 한국인의 주변 인물 중에 조총련 말단 조직의 간부가 있고, 그 인물이 사업 고객이라고 하자. 고객이니까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공화국(북한)은 세금이 없어 좋은 나라예요”라는 ‘북괴 찬양’(반국가 단체에 동조)에 해당하는 말에 “그것 참 좋으시겠군요”라고 맞장구치는 행동은 본의가 무엇이든 아주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것을 ‘고무, 찬양, 회합’이라고 한다. “이번에 한국에 있는 친척한테 갔다 오는데 결제를 며칠 늦춰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더니, “그거 다행이네요. 남조선에 다녀오시는 겁니까? 나는 조총련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남조선에 있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제 고향이 지금 어떻게 돼가는지 보고 이야기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지령 사항’, 그 사람이 한국에 방문하면 ‘잠입’, 돌아다니며 조총련 말단 간부의 고향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면 ‘탐문 수집’, 방한 일정을 잘 소화하고 일본행 비행기에 타면 ‘탈출’, 나중에 거래상의 결제 때문에 그 조총련 말단 간부에게 전화를 걸면 ‘통신 연락’, 결산을 마치면서 “당신 고향도 도로가 깨끗하게 포장돼 좋아졌습니다”라고 알려주면 ‘보고’가 되고 만다. --- p. 80
수사관들은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자꾸 여자를 칭찬했다. 이렇게 정성껏 뒷바라지하는 사람을 좀더 소중히 대하라고 C씨를 향해 설교하면서 닭튀김을 마구 먹어댔다. …… 석방되고 난 뒤에 수사관들은 아내의 친정에 한란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음흉하게도 한란을 달라고 요구했다. 한란은 천연기념물로 제주에서 외부로 반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수사관들은 제주국제공항에 파견한 자기 직원을 이용해 한란을 제주에서 서울로 보내는 불법 행위를 하게 했다. 2계 학원반 이덕룡, 고병철, 최홍상, 김국련 네 명은 불법으로 입수한 제주 한란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공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 나를 감옥에 보내지 않는 대신 마치 당연한 권리라는 듯 제주 한란을 탈취했다. 수사관들은 사람을 죄인으로 조작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p. 141
“두고 보겠어. 이 나라에서 이 나라의 권력이 무슨 짓을 하는지. 역사를 어떻게 만드는지. 여보, 도망칠 구멍은 없어. 그렇다면 현실을 똑똑히 봐주는 것으로 내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어!”
아내는 입을 다문 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좋든 싫든 빨리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활용이라는 명목으로 내 의사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특별 채용을 당할 지경이 됐지만, 나름대로 이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너무도 비참했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얻은 이유는 ‘살아 있는 증인’이 돼 이 나라가 뒤에서 꾸미는 터무니없는 음모를 목격하자는 것이었다. …… 이렇게 마음먹으니 나를 위로할 수 있고 또 나 자신에게 사명이 있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사면초가인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패배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느냐. 굴욕을 인내하고 재일 한국인과 민족 전체의 적인 보안사 그리고 그 원흉인 군사 독재에 통한의 일격을 가하느냐.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 p. 153
엘리베이터실로 들어갔다. 나는 심사실에 남으려고 했지만 김상인이 따라오라고 했다. 유지길 씨는 알몸뚱이가 돼서 의자에 양손과 양발이 끈으로 묶였다. 물을 뒤집어쓴 유지길 씨의 시선에는 적의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봐온 학생들하고 어딘지 달랐다. 방 양 모퉁이에 있는 야전용 수동 발전기에서 이중의 코일을 풀어 유지길 씨의 손가락에 감았다. 김석진이 발전기 레버를 돌렸다. 물에 젖은 유지길 씨의 몸은 그때마다 신음 소리를 내며 펄쩍펄쩍 뛰었다. 김석진이 겁을 주려고 레버에 손을 뻗기만 해도 유지길 씨는 소리를 지르는 지경이 됐다.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불지 않자 이번에는 코일 한 가닥을 성기에 얽어 놓았다. 나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p. 290
보안사는 매년 80명에서 100명 가까운 사람을 연행했다. 연행자는 대부분 대공처의 수사과와 공작과 소관이었다. 이른바 ‘특명 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간첩 용의자였다. 꼭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어느 해(1984년)의 통계를 보고 대충 헤아린 결과 연행자의 8할이 재일 한국이라는 사실이다. 간첩으로 기소된 경우는 물론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기소 유예나 공소 보류로 결정된 사람들을 포함하면 간첩 전과가 붙은 사람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또한 다행히 훈방됐다고 해도 유린당한 인권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한국 군부 독재의 역사는 공작, 불법 연행, 고문의 역사였다. 그 사실을 나는 계속 봐왔다. 침묵은 죄악이다. 내 기분이 어떠했든 내가 ‘수사관’의 한 사람으로서 관여한 조작의 희생자들은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다. 그 사람들의 양심과 진실은 아무도 모른 채 시간만 계속 흐르고 있다.
--- pp. 343~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