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가 처음 시작된 것은 4월이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택되었다는 표현이 가장 가깝지 않을까? 후지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선택되었을 뿐이다. (……) 그들은 후지슌을 선택했다. 그들이 교실에서 기분 좋게 지내주면 우리도 한숨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후지슌을 찾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녀석이 유서에 ‘제물이 되었다’고 쓴 것은 그런 이유이리라. (……) 후지슌은 없어졌다.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어젯밤 일곱 시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 있었던 녀석이 지금은 어디에도 없다. (……) 물건이 하나도 없는 후지슌의 책상은 이미 ‘후지슌의 자리’가 아니었다. 꽃병을 치우면 다른 누군가의 책상과 바꾸어도 구별이 되지 않으리라.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 〈1장 제물〉 중에서
후지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우리의 기나긴 여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었다. 길고 괴로운 여행일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더구나 어디에 도착해야 좋을지 알 수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린 순간이야.”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다르다고 했다.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어.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어느 쪽이 더 낫냐고 묻지는 않았다. 물었다고 해도 대답할 수 없었으리라.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 대신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어느 쪽이야? 넌 나이프로 찔렸어? 아니면 십자가를 등에 졌어?” - 〈2장 방관, 간접살인〉 중에서
“절친인데…… 왜 배신했어?”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겐스케가 스윽 눈길을 피했다. “그건 살인이나 마찬가지야.” 겐스케는 그 말을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에 남겨진 나는 겐스케를 불러 세울 수도 없어서, 그 애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멍하니 계단을 올려보았다. 겐스케가 토해낸 말의 가시는 귀로 들어온 순간보다 오히려 귀를 빠져나가 가슴으로 들어가고 나서 깊숙이 박혔다. (……) “잘은 모르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거나 쓰는 건 그 사람과 이어지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마지막 순간에 외톨이로 있고 싶지 않았다든지…….” “그건…….” 곤란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 “오늘 알았겠지? 너와 사유 짱은 선택되었다는 걸.” 후지슌에게, 그리고 아주머니와 그 사람에게. “슌스케는 사유 짱을 좋아했고, 너도 좋아했어.” - 〈3장 절친〉 중에서
“생각해보면 슌스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계속 살아서 매일매일 추억이 늘어나고 있잖아. 너도, 나도 앞으로 계속 새로운 추억이 늘어날 거잖아.” 그렇다. 후지슌이 죽은 이후, 우리에게는 새로운 추억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별것 아니지만 녀석은 수학여행도 갈 수 없었다. 녀석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앞으로 계속 경험하고, 녀석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그렇다, 중학교 3학년이 될 수 없었던 녀석은 학교 3층에서의 경치조차 볼 수 없었다고 문득 생각이 났다. (……) 후지슌의 어머니는 아들의 추억이 더 이상 늘지 않는다고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추억은 즐거운 것만 골라서 늘릴 수는 없다. 오히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꺼림칙한 것이 더 많지 않을까? - 〈4장 졸업〉 중에서
어쨌든 그동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책과 마찬가지였다. 후지슌이 있던 페이지는 이미 다 읽었다. 사라지거나 없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우리는 이제 새로운 페이지를 펼치고 있었다. (……) 나는 아직 후지슌을 죽게 내버려둔 것을 아주머니에게도, 겐스케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사과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너희는 태연히 잊을 수 있어도 부모는 달라.” 우리도 태연하지 않았다. 결코, 절대로, 하나도……. 나도 순식간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는 살아 있고, 후지슌은 이미 없고…… 잊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잖아요…….’ 생각은 목소리가 되지 않은 채, 목구멍의 안쪽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 〈5장 고백〉 중에서
사람의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한 사람에 얽힌 추억이 강물에 떠내려가듯 조금씩 멀어지고 잊힌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추억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겼던 추억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생하게 다가오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이 파도에 씻기듯 한꺼번에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도 있고 거칠어질 때도 있다. 밀물일 때도 있고 썰물일 때도 있다. 그것을 반복하면서 추억은 조금씩 바다로 떠내려가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때 우리는 겨우 하나의 추억을 잊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 나는 다시 후지슌을 만날 것이다. 아버지가 되고 나서 넘기는 새로운 페이지에는 부모님의 품에 안긴 어린 시절의 그 녀석이 있었다. (……) 겐스케가 말했다. “세상에는 괴로워함으로써 전해지는 사랑도 있지 않을까요?” “무슨 말이야?” “어머니, 아버지는 형 때문에 계속 괴로워했어요. 지켜보는 사람이 힘들 만큼 두 분 모두 괴로워했지요…… 그 대신 그렇게 괴로워하는 동안은 형이 옆에 있지 않았을까요? 엄마, 아빠는 너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부모님에게는 구원이 되지 않았을까요? 형이 그토록 괴로워할 때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형이 없어지고 나서 최대한 괴로워하지 않으면 부모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잖아요.” - 〈6장 이별〉 중에서
“이게 뭐야?”“안 돼! 보면 안 돼! 안 된다니까.”아들은 당황하며 내 손에서 노트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나는 즉시 무엇을 정리한 표인지 알아차렸다. 같은 반 남학생을 절친, 보통, 라이벌, 적 등 네 종류로 구분한 표였다. (……) 그날 밤, 아들이 잠들고 나서 아내가 말해주었다. 이시자키란 아이는 반의 영웅이라고 한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며 성품도 좋다. “사실 그 애는 절친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야.” (……) “하지만 이시자키는 우리 애를 절친이라고 여기지 않을 거야.” 불현듯 후지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 짱”이라고 부르며 말을 걸 때의 얼굴이었다. 너도 그랬어……? 나에게는 이시자키만큼 뛰어난 면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억에서 되살아나는 후지슌은 눈이 부신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전혀 몰랐던가……? - 〈7장 그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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