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전을 개시하는 최선의 방법은 텃케, 까오방과 연결되는 도로상의 전술기지인 동케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결심했다. 동케가 요새화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이 중요한 기지를 파괴할 능력이 있었다. 일단 적이 동케를 상실하면 적은 동케를 탈환하거나 까오방으로 철수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적을 성채 밖에서 격멸시킬 기회를 얻게 된다. 만일 적이 동케를 탈환하지 않으면 우리는 텃케를 공격할 것이다. 일단 적이 동케와 텃케를 모두 잃으면 적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여건은 우리에게 보다 유리하게 변할 것이다. 상황을 분석해본 결과, 우리는 진지전을 치르면서 까오방을 해방시키는 대신, 적을 포위해 항복을 강요하는 편이 낫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 p.38
전시근로자가 전투원을 만나면 그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고향을 물어보고, 만일 군이나 현 혹은 촌락(村落)이 같으면 기쁨에 넘쳐 온몸을 떨었다. 즐거운 노랫가락이 비, 추위 그리고 안개 속에서도 울려 퍼졌다.
고개가 높으면 얼마나 높을까?
우리가 올라가면 고개보다 높지.
누가 이 노래를 작곡/작사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퉁(Thung) 고갯길에서 한 번 불렸던 것인데 나중에 우리 국가문화유산이 되었다.
--- p.159p
1951년은 남베트남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 우리 군사기지는 빈번히 포위되었고, 고립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적의 평정작전에 대응해야 했다. 프랑스는 평정작전을 위해 군종 장사병을 괴뢰 참모에게 인계했다. 프랑스는 특히 젊은이들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입대시켜서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 다양한 병종의 68개 대대를 창설했다. 고맙게도 그들은 7개 정규대대와 2개 포대를 올해 초에 북쪽으로 전환시켜 발생한 결원을 보충했다. 우리는 전선과 군의 재편성을 통해 남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하고, 인도차이나 전장에서 적군의 20%를 묶어놓아 남부를 지원했다.
--- p.211
이 작전에 대해 글을 쓸 때면, 아군 병사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취사병의 ‘발명’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야전 취사 중에 불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면 아군의 위치가 발각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므로, 아군 병사들은 적 정찰기를 피해 야간에 밥을 지어야 했다. 제308여단 의무대 취사병인 황껌은 연기를 빨아내기 위해서 산 중턱에 있는 아궁이까지 연결된 여러 개의 굴을 파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각 땅굴의 입구는 나뭇잎으로 덮고 다시 흙을 얇게 덮어서 습도를 유지했다. 아궁이에서 올라온 연기는 땅굴을 타고 올라와서 엷은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이 방식이 고안된 후, 취사병들은 적 정찰기가 선회하는 동안에도 취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황껌 취사 아궁이는 이후의 모든 작전에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대미항쟁 기간 중 우리 병사들이 쯔엉썬(Tr??ng S?n)지역에 있을 때도 사용되었다. 황껌은 제308여단 병사의 귀감이 되었다.
--- p.277
전역사령부는 일련의 상황 판단에 기초하여, 계획대로 3단계를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번 단계의 목표는 전역 승리를 위해서 모든 병력을 집중해 나싼에 있는 적을 공격,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전투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약점을 먼저, 강점은 나중에 공격한다.
결정적인 지점에 대한 공세를 목적으로 전 지역을 포위한다.
외곽을 먼저 쳐서 전선을 열도록 노력하고 중앙으로 깊숙이 공격한다.”
--- p.334
내가 말했다.
“나는 이 전투에서 우리 모두가 100% 승리를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말이 없던 총참모장이 말했다.
“100%를 확신해야 한다면, 우리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잠시 후, 당위원회는 작전 수행에 있어서 확고한 극복 방안이 없는 수많은 난제에 봉착할 수 있음을 만장일치로 선언했다.
내가 결론을 지어 말했다.
“ ‘승리가 확실한 경우에만 공격한다’는 근본적인 원칙을 감안하면, 우리가 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지도 철학을 ‘속공속승’을 ‘연공연진’으로 바꿔야만 합니다. 공격은 연기하기로 결정합니다. 전 전선에 있는 우리 군은 재집결지로 후퇴하고 대포 또한 끌고 갈 것을 명령합니다. 정치 사업에서는 철수 명령의 이행을 공격 명령의 이행처럼 실시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군수지원 사업은 새로운 지침에 의거해 준비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전환해야 합니다.”
--- p.397
17:30분,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까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결전(決戰) 필승(必勝)!’이라는 구호가 적힌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우리는 바로 그날 야간에 남부구역을 공격했다. 그곳에 있던 2,000여 명의 강력한 적들은 북부 라오스로 철수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군은 추격을 단행해 20:00시까지 따라잡았다. 우리는 자정까지 그들 모두를 생포했다.
55일간 지속된 전투 끝에, 디엔비엔푸에 있던 적 집단전술기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우리의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작전은 완전한 승리였다. 1953~1954 동춘 기간의 전략적 공세가 위대한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 pp.492-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