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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양장, 개정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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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2월 2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556g | 128*188*30mm
ISBN13 9788925550091
ISBN10 892555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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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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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다시 마포대교를 건너 길을 되짚어오기 시작했다. 점퍼 옷깃을 여미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는 진솔 옆에서, 건은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두 팔을 허공에 뻗었다 내리거나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진솔 씨는, 나한테 일기장 같은 사람이에요.”
“…일기장?”
“표현이 좀 그런가? 아무튼 어제도 이화동 우리 집까지 강제로 데리고 갔었지, 오늘도 당신이랑 마무리가 안 되니 뭔가 허전했지. 수첩에 몇 줄 적는 것처럼 꼭 진솔 씨한테 하루를 정리하게 되잖아요. 요즘 계속 그랬으니까.”

- 나는 새삼 파꽃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민들레 홀씨보다 크고 둥근, 얼핏 솜털처럼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빽빽한 가시처럼 퍼진 꽃차례가 소박한 위엄이 엿보였지요. 갓 태어난 꽃 같기도 하고, 이미 늙어버린 꽃 같기도 했습니다. 그제야 파꽃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걸 알았어요. 할아버지가 마당에 한참을 서서 내려다보셨던 까닭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화구를 꺼내 캔버스에다 파 꼭대기에 올라앉은 둥근 총화를 그리던 순간 난 깨달았어요. 내가 계속 이 꽃을 그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요. 운명처럼, 나는 파꽃을 기다렸고 파꽃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 “당신 말이 맞아. 나,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고… 내가 한 여자의 쓸쓸함을 모조리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 내가 옆에 있어도 당신은 외로울 수 있고, 우울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는 데 사랑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진솔은 눈물이 그렁한 채 건의 품에 얼굴을 묻고 듣고 있었다.
“그날 빈소에서, 나 나쁜 놈이었어요. 내내 당신만 생각났어. 할아버지 앞에서 공진솔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요. 뛰쳐나와서 당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그의 속삭이는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머리와 이마에 닿아 스쳐갔다.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진솔은 차라리 젖은 눈을 감아버렸다.

- 나 사랑하는 게 정말 힘들면… 사랑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한테 아무 위로도 못 됐다는 거 아니까. 하지만 도망가지만 말아요, 내 인생에서.

- 댁은 이제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갈수록 공진솔 더 사랑하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 왔지만 진솔은 짐짓 밉게 대꾸했다.
“말도 안 돼. 좋은 시절, 열정 다 쏟아 붓고 껍데기만 남아서는, 뭘 사랑한대.”
건은 조금 괴롭게 웃더니 한동안 망설이며 고민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난 껍데기가 진짜예요.”

- 작은 한숨이 아지랑이처럼 새어 나왔다. 사랑도, 사람 마음도 이렇게 낱낱이 뒤적여가며 볼 수 있다면 좋겠지. 볕을 모아 불씨를 만드는 돋보기처럼, 좋아하는 이의 마음에 누구나 쉽게 불을 지필 수 있다면 좋겠지. 사랑 때문에 괴로운 일 없겠지.
해가 저물 때까지 건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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