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손을 잡고 자발적인 추방자가 되어 광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코러스들이 부르짖는 대사는 그리스 비극의 핵심적 주제를 압축한다. 운명 앞에 오만하지 말 것, 언제나 겸손하게 신을 섬기며 살 것을 말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비극의 교육적 목적은 달성된다. 그런데 어째서 코러스들의 이러한 경고가 오늘날까지도 구구절절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일까?
--- p. 20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셀로의 의처증, 혹은 타인에 대한 의심은 오늘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성정인가. 질투와 원망에서 비롯되어 타인을 파멸로 이끄는 이아고의 검은 마음도 우리가 갖게 되는 얼마나 익숙한 성격적 결함인가. 이런 점에서 오셀로의 결함은 다른 4대 비극의 주인공들이 갖는 그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핍진한 설득력을 갖게 만든다.
--- p. 65
조롱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 모욕인가. 몰리에르에게 희극은 그러므로 웃음을 무기로 한 반대파와의 싸움의 방편이었을 터다.
--- p. 79
『현자 나탄』을 펼쳐 보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다. 나치 치하의 수용소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여러 저술을 통해 유명해진 독일계 유태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독일에서 ‘레싱 상’을 수락하며 이 책의 구절을 언급했다는 얘길 듣고는 희곡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 88
200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여성 소설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노라의 독립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소설로 그린 바 있다. ‘사회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밝힐 거’라며 짐을 싸는 노라, 자신을 교육할 사람은 더 이상 남편이 아니며 교육은 ‘내가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 말하는 노라. 그렇게 집을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나처럼 모든 것에 실패해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게 되었을까? 이처럼 희곡 뒤 이어질 일이 더 궁금한 이야기, 이에 대한 다양한 가정과 상상이 가능한 열린 결말의 희곡도 달리 없을 것이다.
--- p. 125
체호프의 희곡을 자주 무대에 올린 당대 최고의 연출가이자 연기 이론가인 스타니슬랍스키는 체호프의 극을 일컬어 ‘극장을 위한 희곡을 쓴 게 아니라 삶의 광경을 그렸다’고 평했다. 그의 희곡들이 그가 쓴 소설들과 매우 흡사하다 느껴지는 점도 그 작품들이 극장을 넘어선다는 인상을 준다.
--- p. 138
브레히트가 이런 연극을 제안한 데에는 당시 정치 상황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하며 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으로 치달았던 당대 독일 상황은 이성이 마비된 감성과 충동의 정치, 이미지의 정치가 횡횡하며 사람들의 이성을 잠식해가던 시대였다. 이에 대한 대안이 몰입이 아닌 ‘이성’의 연극이다.
--- p. 176
오이디푸스나 햄릿, 맥베스 등이 비극의 주인공이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적어도 그들에겐 충만한 자신감으로 오만과 탐욕을 부리며 뛰어들 삶이 있었다. 현대 비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자본주의가 부려놓은 관계의 늪 속에 질식하다 극단의 결정을 범하고야 만다. 한때 두 아들의 히어로였던 초라해진 늙은 윌리 로먼은 역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모든 걸 ‘한방에’ 해결하고자 한다.
--- pp. 206-207
『하녀들』은 1933년 프랑스의 한 시골에서 실제로 발생한 파팽 자매의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주인 모녀의 눈알을 뽑아 죽인 엽기적 살인사건 뒤 동성애 관계에 있던 하녀 자매는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제 제대로 됐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사건은 장 주네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당대 작가, 철학자들에게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 pp. 221-222
이 작품을 무대에서 처음 보았을 때에도 럭키의 대사, 그 황홀한 무의미의 장광설에 흠뻑 빠져버렸다. 원시 인류로부터 존속했을 연극은 20세기에 이르러 가장 위대한 연극의 언어를 발견했다. 분명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으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장광설의 언어를.
--- p. 230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들이 현대 희곡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눈여겨볼만한 일이다. 오이디푸스나 리어왕 같은 절대군주도 아니고, 오셀로, 빌헬름 텔, 당통 같은 정치적 영웅도 아니다. 과학자가 우리 시대의 영웅, 혹은 문제적 인간으로 떠오른 것이다.
--- p. 238
대관절 누가 희곡을 꼭 이러저러하게 써야 한다고 가르친 것일까? 막과 장이 구분돼야 하고 등장인물이 제시돼야 하며, 어떤 사람이 어떤 대사를 담당하고 어떤 지문대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빼곡 적어놔야 한다고, 누가 그렇게 못을 박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무런 인물 구분이나 할당된 대사, 지문도 없는 『관객모독』은 희곡이 될 수 없는 걸까?
--- pp. 251-252
한 시간 반가량의 시간 동안 관객들의 흥미와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야 하는 1인극은 아무 배우나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터다. 무명에 가까웠던 쥐스킨트에게 비로소 작가의 명성을 안겨준 것처럼 이 희곡 『콘트라베이스』는 공연될 희곡으로서는 물론, 읽는 희곡의 참맛을 느끼게 해줄 훌륭한 텍스트이다.
--- p.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