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지는 선열들의 미래를 향한 외침이자, 우리가 지키고 기억해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어느 날 밤, 갑자기 정전이 됐다. 일순간 눈먼 장님이 된 필자는 휴대폰의 가녀린 불빛을 지팡이 삼아 창고 방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이런 낳을 대비해 어딘가에 준비해둔 초를 찾기 위해서였다. 한참을 뒤적이고 있는데, 그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불이 켜졌다. 엉망이 돼 있는 방안을 멍하니 바라보고 섰는데, 저 멀리 먼지가 수북이 쌓인 오래된 상자 하나가 보였다. 내 것은 분명한데,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후-.’
먼지를 물어내고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필자의 빛바랜 학창시절 사진과 함께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사라졌던 기억들이 그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만약 정전이라는 갑작스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또 먼지를 불어내고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내 것은 분명하지만 잊고 지냈던 소중한 추억들이 그렇게 점점 잊혀져 결국엔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도 이와 같지 않을까? 오랜 시간의, 오랜 무관심의 먼지를 털어내고 직접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우리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가 되어 결국에는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이번 답사기를 기획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조바심 때문이었다. 정말 어느 순간에는 우리의 역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올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잊혀져 가는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는 창고방 먼지 쌓인 상자와 같은 곳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곳은 바로 그날 그 순간의 시간이 묻혀진 ‘사적지’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오늘을 향해 목청껏 독립을 외쳤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고장 난 기억의 파편을 조금이라도 복원해내기 위해 잊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의 궤적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답사의 길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쌓인 무관심의 먼지로 인해 사적지로 가는 길을 희미하고 어려웠다. 답사는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 어느 길도 우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준비과정에서부터 답사 여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하루 동안 1,100km를 주파한 적도 있고, 국경지대에서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 애를 먹기도 했다. 결코 순조롭지 않았던 답사 길을 계속 오를 수 있었던, 아니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 그중에서도 우리의 미래인 젊은이들에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실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산다. 대한민국 여기저기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일 또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타인을 위해, 나아가 우리의 삶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서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정의와 공의로 불의의 폭력에 맞선 선열들의 삶과 정신은 우리의 현재를 존재하게 한 빛나는 씨앗이자.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고, 그 흔적을 찾아 보존하고 기억하는 일이 힘써야 한다. 우리의 답사는 여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됐고, 그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대한민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인들에게도 공동 항일투쟁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런 목적을 가지고 답사에 임했기 때문에 어떠한 고난에 부딪혀도 다시 힘을 내 앞으로 나아가갈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걸었던 그 길을 함께 하고 있다는 가슴 벅찬 뿌듯함은 내일의 여정을 준비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길을 함께 걸어 준 모든 이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역사를 따라 걷다』 1권의 특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내몽고 지역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중국 동북 내몽고 지역에서 펼쳐졌던 한국동립운동의 열기는 우리에게 거의 전달되지 않았다. 염호 선생님과 같은 선학들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이 답사기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가 인간의 이야기이듯 사적지 역시 인간들의 흔적이며 이야기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둘째, 지금까지 제대로 다루지 않은 흑룡강성 북부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려 했다. 이들 지역에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후대들의 오랜 외면으로 그 빛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특히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의사 김필순의 활동 무대였던 치치하얼과 강도 황포군관학교 교관이었던 양림은 그의 부인 이추악과 흑룡강성 상지 등에서 활동했고, 배치운은 행일투쟁을 하다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순국했다. 이들의 이야기에 쌓인 오랜 먼지를 털어내고 누구보다 빛났던 그 들의 삶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은 독립기념관의 배려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필자는 2005년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날들을 중국 동북 지역에서 보냈다. 그 시간들 속에서 필자느 ㄴ한족들과는 한ㆍ중 항일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조선족들과는 ‘조선인(한인)’들의 애환과 현재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준 독립기념관은 필자에게는 고마운 일터이자. 큰 스승이다.
필자는 이 책을 준비하는 지금도 새로운 답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 책은 필자가 시리즈로 내기 위해 공력을 들인 첫 번째 작품이다. 이를 시작으로 앞으로 필자는 두 번째, 세 번?, 그리고 그 다음 작품들을 계속해서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잊혀져가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아무리 험한 곳이든 주저하지 않고 찾아갈 생각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필자가 앞으로 나아갈 그 길에 동행해 주시지 않겠는가? 역사를 따라 걷는 그 길에서 시간의 먼지 속에 묻힌 소중한 보물들을 함께 발견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1년의 절반 이상 집을 비우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중우의를 위해’라고 말하는 남편을 그저 믿고 기다려 주는 아내와 아버지의 빈자리에도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새로운 답사기를 쓰겠다는 필자를 적극 지지해주고 출판까지 해준 선인출판사 윤관백 사장과 편집부 여러분, 교정ㆍ교열에 열과 성을 다해준 김은혜 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책머리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