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몰아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나 한미자유무역협정 문제를 보면,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제국인이다. 한국 이름을 갖고, 한국에서 대학 나오고, 한국에서 한국인 부인과 살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국익은 한국의 국익이 아니라 제국의 이익이다. 내선일체를 꿈꾸던 옛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나 친일파들조차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체감을 제국은 이미 이루고 있다. 1980년에는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그때는 ‘숭미(崇美) 사대주의자’라는 말도 쓰고, 친미파라고도 부르고, 그냥 친미파라고 하면 재미없으니까 ‘미친파’라고도 하고 그랬지만, 친일파냐 친미파는 그래도 한국 사람에게나 붙일 수 있는 말이다. 한국말에 능통한 머리 까만 미국 사람들, 청와대에, 국회에, 정부 각 부처에, 언론사에, 대학에 득시글하면서 한미동맹만이 살길이라 외치는 사람들, 그들의 머릿속엔 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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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아직 대한민국의 형법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일제가 쓰던 옛 형법을 그대로 물려 쓰던 시절인 1948년 12월에 태어났다. 법률 10호이니, 국가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각종 기본법에 앞서 국가보안법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때는 전문 6조에 최고형도 무기형으로 단출했지만, 지금은 전문 25조에 사형이라는 말도 여덟 번이나 나오는 무시무시한 법률로 변했다. 그나마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다섯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손톱, 발톱을 뽑지는 못했어도 조금 다듬어 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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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잊고 싶은 과거가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고통이 피해자가 당한 고통보다 크지는 않다. 지금 고백이 필요한 정말 중요한 이유는 고백이 치료약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통에 허덕이며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당신이 하는 고백은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다. 억만금을 보상금으로 준다고 해도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가해자의 고백으로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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