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째, 시티트래킹이라는 이름의 작업을 해오고 있다. 호주를 시작으로 도쿄, 뉴욕, 서울 등 다양한 도시의 모습들을 펜과 사진으로 담는 일이다.
여행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국적이거나 새로운 풍경에 눈이 가게 된다.
서울에서도 도시의 색깔이 느껴지는 멋진 곳들을 그리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을지로는 뭔가 달랐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거칠고 낡은 오래된 풍경이 화려한 빌딩보다 더 마음에 들어왔다.
다른 동네와는 다른 이 골목만의 매력이 있었다.
익숙한 듯 낯선 듯, 오래된 듯 새것인 풍경을 따라 지나가다 보면
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골목을 채운 물건들이 보인다.
좁은 길에는 자동차보다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더 많이 보이고,
‘삼발이’라고 부르는 바퀴 세 개 달린 이동수단도 자주 등장한다.
횡단보도 옆에 ‘손수레길 자전거’라는 표시가 있는 이유를 알겠다.
길 군데군데에는 특색 있게 생긴 손수레, 간판, 의자까지 표지판처럼 서 있다.
이곳저곳 고치고 손질하고 구조를 변형시킨 흔적을 보고 있자니,
을지로의 장인들은 직접 만들어서 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장소와 물건을 보다 보면 사람에게도 눈이 간다.
낮에는 아버지 세대의 작업자 분들이 골목을 바쁘게 돌아다니시지만,
밤이 되면 멋진 술집과 카페를 찾아온 젊은 세대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일하다, 돌아다니다 마침내 발길 멎은 곳은 노가리 골목.
세대를 가리지 않고 등을 맞댄 사람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며 맥주를 마신다.
‘을지로스럽다’는 표현을 사전처럼 정의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을지로’ 하면 이런 특색 있는 모습들을 떠올리곤 한다.
선명한 이미지들을 구체적으로,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없는 이유는
70년이라는 시간이 골목마다 스며들어 지금의 을지로를 만들었기 때문 아닐까.
이런 모습들이 잊히지 않았으면 했고,
그 안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만큼, 찍을 수 있는 만큼, 그릴 수 있는 만큼 드로잉과 사진으로 시선들을 수집했고, 이곳에 자리 잡고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을지로와 살아온 시간을 함께 나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기홍: 제가 10월에 여기에 왔는데, 그해 겨울에 판코리아 건물을 해체하기 시작했어요. 동네의 구조가 바뀌기 시작한 시점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때 저도 고생한 게, 이 지역 대부분이 옛날 건물이다 보니 구역이 정확하게 나뉘어 있지 않아요. 한 벽을 양쪽 건물이 같이 쓰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여기가 아주 재미난 데예요, 서울 같지 않은 서울. 건축업자들은 그런 사정을 잘 모르죠. 하루는 일하는데 이 벽이 확 넘어가더라고. 대형사고 났지. 저쪽에서는 벽이 서로 붙어 있는 걸 모르니까 포크레인으로 뻥 찼는데 이쪽까지 같이 넘어간 거야. 여기만 넘어간 게 아니라 저쪽으로 붙어 있던 건물도 상당히 넘어갔어요.
설동주: 서울에 아직도 그런 데가….
이기홍: 여기가 아주 재미난 데예요. 서울이지만 서울 아닌 곳이 서울역하고 이쪽 동네예요. 종로, 쭉 들어가서 낙원동까지.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잖아요. 지금까지 그렇고. 70~80년대만 해도 여기가 서울의 중심지였거든요. 그때만 해도 강남이 없었잖아요. 여기 가게 한 평만 있어도 당시에는 돈을 포대로 담는다고 그랬어요.
--- 「을지로의 표정」 중에서
윤소영: 평일과 주말의 모습도 많이 달라요. 평일에는 기계가 덜컥거리는 소리, 배달 가는 소리, 음식 냄새, 심지어 쌍화탕 향기까지 나거든요. 저는 그래서 평일이 더 좋아요. 평일 을지로에 오시는 분들도 그 활기를 좋아하시더라고요.
설동주: 비슷하다. 저도 평일과 주말이 다른 게 매력적이었거든요.
윤소영: 이 동네에 출근하시는 쌍화탕 할아버지가 계세요. ‘어르신, 힘들지 않으세요?’ 하고 여쭤봤는데 너무 즐거우시대요. 항상 뽕짝을 틀어놓고 다니시는데, 비주얼도 비주얼이지만 쌍화탕 냄새가 환상이에요. 이분은 주로 아침에 오시고.
설동주: 이 골목에 오시는 거예요?
윤소영: 네. 골목 에피소드 하나 더 들려드리면, 길을 쭉 따라가면 구둣방이 나와요. 보통 구두 수선 맡기면 안 가고 기다리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자주 마주치는 할아버지가 보통 멋쟁이가 아닌 거예요. 을지로 여기저기 건물을 갖고 계셔서 구둣방을 사랑방 삼아 매일 나들이 나오신대요. 구둣방 사장님과 대화하는데, 독백하듯이 ‘주말에 어디 갔잖아’ 하시면 구둣방 사장님은 ‘그치’ 대답하시고.
설동주 저도 아까 지하철역에서 중절모까지 노란색으로 싹 맞춰 입으신 멋쟁이 할아버지를 봤어요. 우산 딱 들고. ‘을지로의 멋쟁이’ 코너를 넣고 싶네요.
--- 「을지로의 풍경」 중에서
윤병주: 제가 워낙 맛집을 좋아해서 을지로는 어렸을 때부터 수시로 다녔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이 일대를 다 찍어놨죠. 사람들이 몰리기 전, 작가들이 들어오던 시절이에요. 어디든 히트치는 공간은 작가들이 먼저 만들어놔요. 경리단도 마찬가지고 연남동, 망원동, 해방촌 다 작가들이 먼저 가요. 월세가 싸거든요. 가서 예쁘게 꾸며놓으면 밖에서 작업실 보고 ‘어, 저기 카펜가 본데?’ 하면 아니나 다를까 카페가 생겨, 아니면 작가들이 힘드니까 커피라도 팔아볼까 해서 직접 팔아, 그게 시작이에요. 을지로도 ‘신도시’가 시작이잖아요. 신도시도 작가들이 자기들 놀려고 만든 거니까. 우사단은 제가 1호고요. 우사단 붐 일어날 때 제가 사진 작업도 많이 도와줬어요. 그런데 지금은 매력을 잃어버렸어. 우사단이야말로 지역 특색이 강한 곳이었는데. 여기는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거긴 정말 다양했거든요. 재미있었고. 지금은 안 그래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죠.
설동주: 을지로는 지금 어떤 것 같나요?
윤병주: 을지로는 지금 방향이 좋다고 봐요. 기존 가게들이 1층에 현존해 있고. 1층은 우리가 파고들지 않잖아요. 이런 방향이라면 젠트리피케이션도 방어할 수 있는 거죠. 을지로가 앞으로의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을지로의 공간」 중에서
서지애: 가게 자리를 한번 보기나 하자고 해서 왔는데, 창문도 크고 스튜디오와 분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바로 을지로에 왔어요.
김진영: 사실 여기도 처음부터 상태가 좋지는 않았는데.
서지애: 다방이었거든요. 30년간 다방이었는데, 일단 천장이 굉장히 낮았어요. 처음에는 간단하게 뜯으면 될 줄 알았는데 뜯다 보니 불이 났던 자리라 뭘 할 수가 없더라고요. 예전에 계셨던 분들도 30년 동안 불난 자리 위에 덧대서 공사하다 보니 폐기물도 많고.
김진영: 예전에는 조명이며 전깃줄을 안에 다 숨겨놓았으니까. 단도 많았고, 벽에 옛날 나무장식도 많았어요. 이 벽도 저희가 만든 거예요. 원래 합판이었던 걸 시멘트로 새로 세웠고요. 그래서 을지로가 이런 데라는 걸 확실히 알았죠(웃음). 천장 뜯는 작업은 전문가에게 맡겼는데, 그분들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 「을지로의 물건」 중에서
설동주: 원래 을지로나 충무로에 인쇄소가 많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없어진 이유가, 이전한 것도 있겠지만 방금 말씀하신 산업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겠네요.
박철성: 그렇죠. 산업의 행태가 변하는 거죠. 우리 아버지는 활판인쇄와 등사인쇄를 했어요. 그런데 내가 하는 레터프레스나 리소도 활판과 등사인쇄예요. 베이스가 그거야. 이름만 바뀌고 기술만 진화했지 베이스는 똑같아요. 아버지가 하시던 시대와 내가 하는 시대에 정확히 30년의 간격이 있어요. 내가 30년 뒤에 아버지 시대와 다시 조우한 건 어찌 보면 행운이기도 하고 운명이기도 하지만, 내 아들이 30년 뒤에 인쇄업을 할 때는 아버지나 내 시대보다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디자인점빵이나 인쇄학교가 트렌디하고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30년 전의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거예요. 아버지 시대 유물을 계승하고 있는 거지. 트렌디해 보이는 것은 이전의 유물을 해석만 다르게 하는 거고요.
--- 「을지로의 간판」 중에서
권민석: 이화다방 시절에도 젊은 손님들이 있었어요. 어두컴컴하고, 패브릭 소파들도 딱지가 앉을 정도로 오래됐지만 그래도 손님이 있긴 있더라고요. 담배를 피울 수 있어서 근처 직장인들도 많이 왔대요. 당시 사장님이 눈감아주고 바 안쪽에서 같이 담배 피우셨거든요. 흡연자들에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죠. 작년(2018년)까지만 해도 그랬어요. 그리고 어르신들도. 점심시간에 직장인들 가고 나면 카페에 들어가기 어려워하는 어르신들이 힘들게 2층까지 올라와 문을 발로 차면서 ‘커피 한 잔 줘봐요’ 하는 거예요.
설동주: 그런 이야기는 다 어디서 들으셨어요?
권민석: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들한테서요. ‘내가 옛날에 판코리아 갔다가 여기서 헌팅해가지고~’ 이러면서 젊은 시절 이야기도 하시고 이화다방 옛날 모습도 이야기해주시고, 근처 가게 사장님들도 ‘이화다방이 바뀌었네?’ 하시면서 이런저런 일화를 들려주세요.
설동주: 드나드는 분들이 옛날부터 다양했나 봐요.
권민석: 저희 오픈 준비하느라 공사할 때도 별의별 물건들이 다 나왔어요. 가짜 부동산 투자 서류, 위조지폐 만드는 틀, 6·25 참전용사 훈장증, 갖가지 의학서적 등등. 예전에는 무슨무슨 종파 몇 대손 모임 할아버지들이라거나 종묘제례 올리시는 분들이 제사 끝나고 와서 담소 나누시고 그랬대요. 다방 안쪽 방에서 종묘제례에 쓰이는 한복도 나오고, 그분들이 같이 찍은 사진도 나왔어요. 진짜 매력적인 곳이죠.
--- 「을지로의 시간」 중에서
권동현: 여기는 블록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종묘만 가도 또 다르고. 처음 작업실은 을지로3가 쪽이었는데 딱 대기업과 을지로 소상공인 사이에 있었거든요. 경계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회사를 그만뒀지만 회사에 속해 있는 것 같고. 모든 업종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생태계라는 느낌도 들고. 공장이나 시장 분들이 아침을 열고, 밤에는 회사원들이 늦게까지 일하고. 지하철 출구에서부터 그런 대비가 느껴져요. 을지로3가 12번 출구는 대기업 쪽이고, 11번 출구는 공장이나 작업실이 많아서 사람들도 가는 방향이 나눠지거든요.
설동주: 제 생각에도 이 시대에, 이 타이밍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을지로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생산자, 메이커가 많다는 점도 그렇고.
권동현: 가게 하는 분들도 파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고. 일종의 동질감을 느껴요. 제품을 만들거나 인쇄하러 공장 찾아가면 다른 동네에서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동네는 무조건 다 된대요. 그리고 되게 흥미로워해요. 봐봐. 줘봐. 뭔데? 이러시면서.
--- 「을지로의 대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