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빵을 구걸하면서 러시아 전역을 절룩거리며 걷는 그리스도(the lame Christ)의 모습이었다. 그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마다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와, 심지어 죄인들에게조차 찾아와 그분 자신의 궁핍을 통해서 그들의 자비심을 되살리려 오실 분이다. 눈 깜빡할 찰나에 나는 이 꿈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건한 백성의 꿈이 아니라, 공상이 아니라, 전설이 아니라, 러시아인들의 특권이 아니라, 사람 속에 계신 그리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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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4년에 대분열을 통해 서방교회가 동방교회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만물을 해방시키셨으며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이런 심원한 이해를 점차 잃어버렸다. 대신에 우리는 점차 신적인 현존을 예수라는 단 하나의 몸에 국한시켰다. 신적인 현존은 빛 자체처럼 어디에나 있으며 인간의 경계선들로 제한시킬 수 없는 때에 그렇게 국한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믿음의 문이 닫히게 된 부분은 초대 교인들이 “현현”이라고 부른 주현(Epiphany)에 대한 이해, 또는 가장 유명하게도 “화육(성육신, Incarnation)”에 대한 가장 폭넓고 아름다운 이해를 못하게 믿음의 문이 닫혔으며, 또한 화육의 마지막이며 완전한 형태인 “부활”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들은 원래 이런 주제들에 대해 훨씬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서방교회의 카톨릭과 개신교회들은 모두 최근에서야 비로소 이런 통찰력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씀이 육신(flesh)이 되셨다”(요한 1:14)고 말하면서, 단 한 사람의 몸(body)을 가리키는 용어 ‘소마(soma)’ 대신에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용어 ‘사르크스(sarx)’를 사용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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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우주적인 개념은 어느 누구와 경쟁하지도 않고 어느 누구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포함하며(사도행전 10:15, 34),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전체 우주에 합당한 하느님이 되도록 허락한다.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렇게 이해할 때, 창조주의 사랑과 현존은 창조된 세상 속에 근거하게 되며, 또한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정신적 구별은 무너지게 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것처럼, “당신의 인생을 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마치 어떤 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마치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방법이다.” 앞으로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 p.16~17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이처럼 물리적 피조물 속에 자신을 계시한 것이 첫 번째 화육(Incarnation: 성육신, 영이 육신을 입은 것에 대한 총칭적 용어)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 일어난 것으로 믿는 인격적인 두 번째 화육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프란치스코회 언어로 표현하자면, 삼라만상은 첫 번째 성서(the First Bible)로서, 두 번째 성서(the second Bible)가 기록되기 전에 137억 년 동안 존재했다.
--- p.23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어둠이 이길 수 없는 빛”(요한 1:5)이라고 묘사한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확한 표현이었다. 사물들의 내적인 빛(the inner light)은 제거하거나 파괴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은 매우 희망적인 것이다. 그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요한이 능동태 (과거진행형―역자주) 동사를 선택한 것(“그 빛이 세상 속으로 오고 있었다.” 요한 1:9)은 그리스도 신비가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인 과정, 즉 우주를 채우는 빛처럼 불변의 상수(constant)로서 계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빛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창세기 1:3). 이것을 잊지 말라.
--- p.25
나로서는 완전한 그리스도 신비를 참되게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기초에서부터 개혁하기 위한 열쇠인데, 이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우리들만의 배타적인 집단 속에 집어넣거나 잡아두려는 어떤 시도에서든지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신약성서가 극적으로 또한 명백하게 표현한 것처럼, “천지창조 이전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으며 … 하느님의 자녀들로 선언되었으며, 태초부터 선택됨으로써”(에페소 1:3, 11), “그분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로 만드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1:10). 만일 이 모든 것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모든 몸을 포함하는 자연종교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는 태초부터 해결되었다. 그리스도교를 통해 세뇌된 당신의 머리를 떼어내어 세차게 흔들어 당신이 배운 것들을 떨어낸 다음에 다시 붙이도록 하라!
--- p.35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도 신비에 주목하지 않는 가장 큰 본보기는 우리가 계속해서 행성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방식에서 볼 수 있을 것인데, 행성 지구는 우리 모두가 의존해서 살아가는 터전이다. 오늘날 과학은 대부분의 종교들보다 훨씬 더 물리적인 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는 과학과 기업이 대다수 사람들?심지어 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설명하는 주체들이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이나 구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물리적 우주를 포함하지 않았거나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이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있다.
--- p.66
그러나 여기서 그 수단, 매개물, 그리고 그 최종적 메시지는 육체적이며 먹을 수 있는 것이며 씹을 수 있는 것, 그렇다, 소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살이다. 고대 종교의 상당수는 신이, 제단에 바쳐진 인간이나 동물들을 먹거나 희생 제물로 삼았지만, 예수는 종교와 역사를 완전히 뒤집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고 계신 것을 상상하도록 초대한다!
--- p.181
20세기에 현대 심리학이 어떻게 인간들이 거의 언제나 자신들의 무의식적인 그림자(shadow)를 타인들과 다른 집단들에 투사하는지를 밝히기까지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패턴을 2천 년 전에 밝혔다. 즉 예수는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요한 16:2)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결함들을 증오하며, 또한 슬프게도 그런 투사--- projection)를 흔히 가장 잘 은폐하는 것이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과 종교는 우리의 대부분의 폭력을 정당화하며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숨는 데 이용되어 왔을 것이다.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