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케이팝이 한국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록이나 재즈, 힙합처럼 일반적인 대중음악 장르로 자리 잡았다면, 그것을 어떤 언어로 부르건 어떤 나라 사람이 구현하건 별다른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케이팝은 다른 장르들과는 달리 특정한 국가 및 인종?민족적 요소와 강하게 묶여 있다. 이는 글로벌 문화 상품으로서 케이팝이 추구하는 초국가성(transnationality)과 때때로 충돌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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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음악 산업의 중심에서 성공한 동아시아 음악이 여전히 흔치 않은 상황에서 케이팝의 지역 정체성인 K는 필연적으로 케이팝에 특별한 개성을 부여한다. 한글 가사, 음악을 혼합하는 방식, 무대 퍼포먼스와 춤, 의상, 뮤직비디오, 기획사-아이돌 시스템, 도덕주의 원리 강조, 팬덤의 수용 방식 등이 모두 결합되어 독특한 특징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케이팝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한국적이지는 않지만, 글로벌 보편성과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지역 정체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매우 한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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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의 해외 팬들은 일반적인 서구 중심의 글로벌 팝 음악에 대한 일종의 대안 개념으로 케이팝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국어 가사나 다른 한국적인 요소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글로벌 시장에서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과거와는 달리 일찍부터 인터넷 기반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주류 문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비주류 문화 콘텐츠를 향유해 온 글로벌 Z세대에게는 비서구·비영어권 음악이라는 점이 과거만큼 커다란 문화적 장벽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케이팝을 통해 Z세대들이 그 속에 담긴 한국적인 요소들을 일종의 ‘쿨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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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Z세대에게 호소력을 지닌 BTS의 직접 소통과 친밀한 이미지 구축이 케이팝 가수들의 공통적인 소통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다분히 한국적인 특성이다. 팝의 글로벌한 보편성과 대조되는 이 K가 글로벌 Z세대의 감성을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다름에 비교적 익숙하고 심지어 이를 쿨함의 일종으로 여기는 Z세대의 감성에 글로벌 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BTS의 음악과 이미지가 잘 들어맞았다는 점도 BTS의 한국적 특성이 가진 중요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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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국제 상설 중재 재판소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판결한 직후 빅토리아, 차오루, 페이, 레이 등 케이팝 내 거의 모든 중국 출신 아이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자신들의 소셜 미디어 페이지에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상징하는, ‘중국은 조금도 작아질 수 없다(中國一点都不能少)’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그림을 올렸다. 중국 팬들은 여기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베트남과 필리핀을 포함한 다른 동아시아 팬들은 물론 중국의 팽창주의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는 한국 팬들은 강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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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이 글로벌 인기 장르가 된 지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흑인이 하지 않는 흑인 음악은 가짜고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버는 타 인종은 도둑놈이다’라는 인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흑인 음악 분야가 이러한데, 비서구·비영어권 음악으로 영미 대중음악과의 차별성을 통해 개성을 어필해 온 케이팝에서 K를 분리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음악적으로나 외적 이미지가 케이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한국인이 없는 케이팝은 진정성을 항상 의심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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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역시 진정한 글로벌 장르가 되려면 자신의 국가·민족 정체성을 상징하는 K를 보류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힙합과는 달리 케이팝이 전 세계에서 본격적인 현지화 또는 토착화가 이루어져 진정한 의미에서의 글로벌 음악이 된다면 그것은 브이팝, 티팝, 큐팝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며, 그 경우 해당 지역에서 장르로서의 케이팝은 자연스럽게 소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케이팝이 갖고 있는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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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해외 시장의 파이는 매우 커졌다. 케이팝 팬덤 연구소 블립(Blip)의 자료에 따르면 2019년 8월 전 세계에서 발생한 케이팝 관련 유튜브 영상 조회 수 중 한국의 비중은 단 10.1퍼센트에 그쳤을 정도다. 이제 케이팝은 해외에서 훨씬 더 많이 소비된다. 그 결과 아이돌 그룹과 기획사는 해외 팬덤만 확보해도 어느 정도 수익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와 해외 팬덤 사이의 취향 분화는 국내 케이팝 기획사와 가수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아울러 케이팝 신 전반에 대한 해외 팬덤의 영향력은 크게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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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시장이 커지고 해외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케이팝 가수들이 늘어나면서, 국내 팬들은 해외만 신경 쓰고 국내는 소홀히 하는 기획사와 가수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일이 잦아졌다. 케이팝 팬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 인터넷 게시판에 ‘한국 활동에도 신경을 좀 써 달라’는 의견을 피력하는가 하면, 한국에서 팬 미팅이나 콘서트를 할 때면 ‘케이팝 가수의 내한 공연’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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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미디어 플랫폼의 발달과 그로 인한 직간접적인 문화 교류 증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 등은 전과 다른 문화 산업 환경을 만들어 냈으며, 케이팝은 이런 환경의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수혜자다. 이제 미국을 포함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문화 중심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틈새시장으로 빠르게 전달되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이 여전히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해서 과거처럼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문화 중심으로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그로 인해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문화 취향을 갖게 되는 세상이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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