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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강 | 예담 | 2013년 04월 2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2 리뷰 2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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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4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544g | 145*210*30mm
ISBN13 9788959137299
ISBN10 8959137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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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윤지강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숭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계간 『동서문학』에 단편소설 「팔레트와 물감」으로 등단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역사 속 우리 여성을 탐색하여 문학적으로 오롯이 되살리는 데 몰두하고 있다. 저서로는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도산 안창호 이야기』, 『세계 4대 해전』, 『송아지 아버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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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거문고를 무릎에 비껴 안고 괘하청, 괘상청을 훑어 양청 소리를 내 《영산회상》의 서막을 열었다. 왼손으로 줄을 흔들고 밀었다가 퇴하고 울리어 치거나 가볍게 움직이고 밀고 또 밀었다가 퇴하고 은은하게 움직여 쉴 새 없이 농현을 하니 좌중이 다 숨을 죽였다. 왼손으로 끊임없이 현을 희롱하고 오른손의 술대로 줄을 올려 긋고 내리찍으며 비류직하로 현침을 탕탕 치고 손목뿐 아니라 머리, 어깨, 나아가 온몸을 흔들며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평조, 우조, 계면조, 중고조로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성음을 냈다. 나는 망아지경의 경지에서 오로지 유희경만을 위해 연주했다. 나는 그를 위해 노래하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그는 나를 깃들게 하는 울울한 나무였다. 나는 어느새 나무에 내리는 비가 되었다. 나는 나무에 쌓이는 함박눈이 되었다. 나는 거문고의 현란한 파동 사이로 날아오르는 새카만 암컷 산제비 나비가 되었다.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1부/금낭 속 선약_ 40p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 무엇 때문에 나를 전주 교방으로 가라고 했을까, 나는 늘 그것이 의문이었다. 찬모의 말대로 내가 송 진사에게 잡혀 웃방아기로 팔려 가느니 차라리 기생이 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차갑게 굳어가는 아버지의 시신에 엎드려 내가 몸부림치며 울고 있을 때 말 한 마리가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공포로 질려 울음을 멈춘 내 앞에서 말이 멈춰 섰고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송 진사의 사랑채에서 보았던 평량자 갓 쓴 남자인 것을 알기까지 나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떨었다. 송 진사의 친구들이 내 노래를 듣고 천구성이다, 명창이다, 집안에 가비를 키우느냐 다떠윌 때 그 남자만이 말없이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아버지의 시신에서 떼어내 말에 태워 전주 교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야 이름을 물었다. 유희경. 내 평생의 남자가 될 사람을 나는 그렇게 열세 살에 만난 것이다.---3부/꿈속에서나 그릴 뿐_ 196p

어느 순간 그의 눈빛이 먹물처럼 컴컴해졌다. 내 가슴에 어떤 파문이 인다. 내가 그를 떠나면 그가 완전히 황폐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머뭇거리게 한다. 그가 나의 균열을 예리하게 감지한다. 교활한 그는 자신이 빨았던 담배물부리를 내 입에 갖다 대준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담배물부리를 깊이 아주 깊이 빨아들였다. 그의 컴컴한 눈빛에 순간 빛이 출렁인다. 그 간절히 보내오는 신호에 내 가슴의 어느 한쪽이 무너져 내린다. 나는 그가 선택한 것이 쾌락이 아니라 고통으로 서서히 자신을 살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그 자해의 의식에 동참하고 싶은 맹렬한 충동을 느낀다. 그가 내 입에서 담뱃대를 빼 상 위로 팽개치듯 밀치고 불처럼 뜨거운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갠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대로 무너져 그와 함께 육신의 한 조각까지 다 소진하고 싶다.---3부/한 조각 무지갯빛 꿈_ 351~352p

돌탑이 쌓인 길을 계속해 올라가다가 나는 한 돌탑 위에 남근석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돌이 어떤 돌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돌을 집어 들려고 손을 가져간 순간 나는 뜨거운 기운에 놀라 돌에서 손을 떼냈다. 9월의 흐릿한 날이라 태양빛으로 인해 돌이 달구어졌을 리도 없었다. 나는 착각한 것은 아닌가 해 슬그머니 다시 돌로 손을 가져갔다. 여전히 돌은 뜨겁게 내 손에 반응하고 있었다. 내 가슴에서 말할 수 없이 뜨겁고 격정적인 덩어리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그녀의 어린 연인 천이 처음 그곳에 올려놓았고 그녀가 몇 십 년이나 간직했던 그 돌을 내 손에 꼭 쥐었다. 찰나의 순간 나는 아주 높고 먼 시원의 어느 곳으로 내 자신이 높이 쳐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인 것만 같았다. 나는 천이었다. 그녀에게 처음 그 돌을 안겨주었던 열네 살의 순수하고 끌밋했던 소년 천. 늙은 나는 돌을 껴안고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꺾었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고서도 단 한 번 마음 놓고 울어보지 못한 울음을 나는 마음껏 쏟아냈다.
---결(結)_ 396~3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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