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위험의 종류는 사망, 사고, 질병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험시장의 분류 방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동차보험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위험을 정의하면서 사망을 보상한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은 자동차 위험으로 포함된다. 질병보험은 동일한 치료비가 든다 해도 질병의 종류에 따라 다른 위험으로 분류한다. 사망은 여러 위험에 동시에 속하기도 한다. 한편 동일한 치료비가 들어도 어떤 질병은 위험에서 제외되거나 다른 위험으로 분류된다.
보험시장에서의 위험의 분류는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상품화의 편의성에 따라 분류된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분류를 받아들이고 사용한다. 보험시장에서뿐 아니라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도 이해 집단의 목적에 따라 위험은 발견되고 분류된다. 위험은 우리 주위에 늘 존재하지만, 그 위험이 항상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위험으로 인지하는 것들의 상당수는 위험이 어떻게 묶여서 상품화되거나 공론화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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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의 법칙과 상호성의 원리는 같은 원리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접근법은 다르다. 상호성의 원리가 대수의 법칙을 경제학적 표현으로 다시 썼다는 것은 단순히 효용이나 위험 회피 등의 경제학적 용어를 썼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것은 상호성의 원리에서는 위험 통합에의 참여가 철저히 이기적인 계산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위험 통합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크기 때문에 통합에 참여하게 되고 손실을 분담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상부상조의 전통적 보험 정신과 상호성의 원리 사이에도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 측은지심으로 남을 도움으로써 사후적으로 나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돕는 것은 결과는 같아 보일지라도 도덕적으로도 같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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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명기에서부터 현재까지도 국가가 제공한 보험과 구제는 가난한 자들을 금융의 피해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보험이 금융의 일부로 편입되어 소비자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면 보험이 금융으로 변질되면서 보험의 근본 정신인 상부상조의 원칙이 퇴색되고, 그 대신에 이익 추구의 원칙이 보험을 지배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상부상조란 공유하고 함께 나누는 것(sharing)을 말한다. 이는 좋은 일도 포함되지만 나쁜 일과 위험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는 더 넓게는 공동체의 기초 자산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와 나눔이 시장 내의 거래로 바뀌면서 계산적인 교환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제 경제학에서 위험의 공유(risk sharing)는 위험의 거래(risk trading)를 통해서 이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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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은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위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 대신 손실이라는 모습으로 실현된다.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논의되는 다양한 현상이나 모습은 위험에 대처하는 특정한 대응 방식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는 위험에 대응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표현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대응 방식이란 위험을 정의하고 가격을 계산하여, 시장이나 제도를 통해 그 위험을 거래, 전가 및 보유하는 것을 말한다. 보험계리의 발달은 위험의 가격을 좀 더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위험의 전가와 보유를 통해 새로운 위험을 추구하는 역동성을 갖게 된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바로 이 지속적으로 위험을 전가하고 보유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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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로 대표되는 현대의 기업 조직은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다. 자본가는 자본을 경영자에게 대여하고 경영자는 경영을 통해 수익을 올려 차입한 대가를 지불한다. 경영자는 물론 혼자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노동자와 협력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기업은 물론 생산 과정에서 시장을 이용해서 다른 기업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기업 내부에서 생산을 하기도 한다. 새로운 경쟁자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품으로 기존의 시장과는 다른 새로운 시장 질서를 만들어나가기도 한다. 구체적인 행동이나 결과는 다르지만, 기업의 활동과 관련된 공통된 주제어는 협력과 위험이다.
협력은 반드시 같이 일하는 협업의 의미가 아니고 노동의 정교한 분업을 통해서도 이뤄질 수 있다. 협력의 범위가 법적인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기업의 경제적 울타리는 사실상 모호해지기도 한다. 협력과 더불어 위험은 기업의 탄생 시점에서부터 기업의 존재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업은 끊임없이 위험을 전가하는 장치를 개발하고 적용해왔다. 유한책임, 인수합병, 담합이나 전략적 제휴, 하청 계약, 노동 계약, 보험, 품질 보증, 금융 위험 헷지 방법 등은 기업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적용되었다. 기업을 어떤 관점에서 살펴보든 그 뒤에는 항상 협력과 위험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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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은 위험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인 위험인 죽음과 삶의 고통에 대한 대응으로 종교를 만들고 믿어왔다. 종교의 기능은 보험의 기능과 다름 없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무한한 삶이나 해탈을 약속한다. 믿음에 따른 현세의 고통은 사후의 무한한 기쁨과 생으로 보상받는다. 현세의 고통은 보험료이고 사후의 무한한 기쁨은 보험금으로 해석하면 종교야말로 진정한 생명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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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시대에 위험을 가장 잘 통제할 수 있고 개인들이 의지할 곳은 여전히 국가와 정부다. 국가와 정부는 결국 사람들이 의지를 갖고 정치력으로 사회를 조직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엘리트들만의 정부가 아닌 일반 시민의 정부를 만들어 나아가고, 의사소통과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하며, 서로 배려하는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위험사회에 대처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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