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장편소설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시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물론이고, 그러한 성찰의 결과물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자기만의 고유한 방법론적 탐구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것은 단순히 시각의 확보가 안 되니까 스타일이라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전망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우선은 순심(純心)으로 구체적인 삶과 시대의 명암을 절실하게 응시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미학적 형식을 창출하자는 간절한 제안인 것이다.
--- 이경재, 「장편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중에서
단일하고 완전한 ‘나’는 일종의 판타지이며 ‘나’의 의식은 그 자체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이다. 완전한 ‘나’라는 환상에 경도되어, 자신의 불완전한 틈새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위장하는 자의 고백을 좀처럼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부정하지 않는 자리, 그곳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진실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 김영희, 「귀신전과 연출의 변」 중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감동”과 사회적 현상에 대한 “경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이다. 즉 시는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요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대한 적극적 참여 욕구 내지는 그것이 해소되고 정화되는 단편적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 모두를 내포한 운동성 그 자체에서 끊임없이 탄생한다.
--- 남승원, 「‘동일성의 시론’으로 본 균열의 미학」 중에서
검색어를 통과한 언어는 결코 사전어로 수렴되지 않는 상상력들로 더욱 발랄하고, 더욱 기괴하며, 더욱 스산한 다른 말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 잉여들이야말로 다른 말들, 다른 정치들을 만들어 내는 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실의 모순과 변화와 고통들에 대해 문학이 구체적인 관심으로 끊임없이 다른 감각들, 다른 세계를 향한 충동들을 형상화해 내지 못한다면, 문학은 도처에 난무하는 풍자의 직접성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다른 세상을 향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지도 못하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 서영인, 「문학의 빈곤과 전환의 상상력」 중에서
아직 한국 소설은 이 분노를 정치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행동의 모델을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폭발할 것 같은 육체와 죽음으로 벼려진 언어, 수치와 굴욕의 형태로 축적되는 분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태초의 인간이 그런 것처럼 곧 “행위”를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문학은 분노라는 도약대를 통해 시간의 반복을 파괴할 것이다.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분노의 날이 도래하고 있다.
--- 서희원, 「분노의 날」 중에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놓여 있는 문제 지점에 대한 고찰은 비판적 탐구자가 원하는 바로 그런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열세 살」 중에서이나 「순애보」 중에서의 소녀들이 그러하듯이 ≪환영≫이나 ≪나쁜 피≫의 그녀들은 자본과 결합한 가부장제를 철저하게 내면화한 존재들이다. 삶에 임하는 태도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삶은 온전히 긍정적 의미를 담지 못한다. 자본의 원리에 깊이 침윤되어 있으며 가부장제의 구조적 폭력성을 몸으로 체현하는 존재들인 때문이다. 사회(현실)의 모순을 체현하는 동시에 만들어 내며 동조하고 공모하는 존재들이라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려워지는 것은 이 대목에서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기--- 말’을 가지지 못한 그녀들의 복합적 정체성은 ‘말하는 입’을 가진 이들에 의해 과연 온전히 포착될 수 있는가?
--- 소영현, 「서발턴을 위한 문학은 없다--- 김이설론」 중에서
세계가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려 간다고 느낄 때 우리는 역사란 이름 아래 가려진 시의 형식들을 다시 호출해야 한다. 문학의 정치성을 확인하는 일이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관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써 온 무엇을 다시 재발견하고 그것을 현재의 쓰기를 위해 변용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송종원, 「미래가 되지 않은 것들」 중에서
개인의 고통은 그 개인만이 앓는 것이어서 누가 대신 앓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이 예술 작품으로 제시되면, 고통을 앓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미적으로 객관화된 고통에 공감하고 반응하면서 집단적인 심성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해서, 고통을 형상화해 드러내는 예술 작품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존재론적 힘을 북돋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기에 한 개인의 고통을 언어로 구성하여 객관화한 한 편의 시 작품은, 그 고통이 순전히 개인적인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이성혁, 「한국 근대시와 고통의 시화」 중에서
무능하고 연약한 모성을 버리고 강력한 계모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진입을 시도하는 소녀의 모성 판타지는 보다 안전하고 강력한 세계에 편입하고자 하는 세대가 그려 낸 유토피아의 형상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다. 당초 저항과 반역을 꿈꾼 일조차 없건만 그 세계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진입이 봉쇄되어 있다. 모성의 부엌에서는 생존의 절박함이 모든 논리를 대신한다. 어떤 생명이 살기 위해서 어떤 생명은 사라져야 한다. 생존 위기에 몰릴수록 모성의 은총은 제 자식, 그중에서 적자를 가려내고 그 나머지는 희생양으로 돌린다. 이것이 모성의 세계가 보여 주는 잔혹함이고, ‘진짜 엄마’의 얼굴이다.
--- 정주아, 「‘계모 찾기’, 버림받은 세대와 냉혹한 모성의 세계」 중에서
서사 장르에서 창의적인 이야기의 힘은 그 내용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소를 배치하고 조율하는, 사건의 단서를 감추고 드러내는, 다시 말해 이야기를 구축해 나가는 방식은, 궁극적으로는 삶이라는 미스터리에 어떻게 가닿을 것인가라는 이야기꾼의 질문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별것 아닌 이야기 앞에서 불현듯 신음을 토하게 되는 순간은, 이야기꾼이 우리가 사소하게 지나쳐 온 것들을 통해 은연중 본질을 파고드는 순간이다.
--- 차미령, 「이야기꾼의 탄생과 진화2-윤성희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