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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숨, 쉼을 가져요

한 숨, 쉼을 가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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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top2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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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6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244쪽 | 270g | 111*180*20mm
ISBN13 9791186561706
ISBN10 118656170X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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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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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가 되어 부러운 눈으로 멍하게 쳐다보았던 그들도 하루를 ‘잘’ 보내는 삶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래서 더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몰려오는 파도와 정면으로 부딪치려고 애쓰기보다 파도의 굴곡을 눈치챌 때 빈틈을 만들어 잠시 멈춰야 한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고 파도가 잠잠해지면 그 마음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조율하며 살아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여행은 단지 이걸 깨닫기까지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내면의 파도를 잠재우려고 떠난다.

보들보들한 푸른 밭, 그 가운데 단단한 빨간 지붕. 빌딩 숲이 아니라 보슬한 녹색 나무가 가득 찬 곳. 헬싱키다.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북유럽 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새하얗게 눈 쌓인 곳에서 빨개진 코를 녹여주는 달짝지근한 코코아를 마시는 겨울이기에, 녹음이 짙은 여름은 상상하지 못했다. 기차를 같이 타고 온 사람들이 줄지어 함께 걷는데도 혼자 동떨어진 듯 갑작스레 언어도 낯설다. 얇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속에서 나 홀로 입고 있던 두터운 기모 후드 두께만큼이나 어색했다.

여덟 시가 되자 비로소 시원해진다. 괜찮은 펍에 가려다가 마트에서 간단히 맥주와 군것질거리를 사서 강바람을 등져 다리에 앉았다. 당일치기 손님들이 떠나간 다리 앞으로 해가 내려가고 낮부터 끊임없던 노래가 등 뒤로 이어진다. 명당. 맥주는 쓰지 않고 납작 복숭아와 감자칩은 단짠단짠. 완벽하다. 해가 지지 않을 뿐인데 하루가 길어졌다. 시간이 늘어나니 한정 없이 느긋하다.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빼곡하고 촉박했던 시간이 바람처럼 흩어진다. 21시 35분, 아직도 밝다. 시차도 있고 백야도 있어서 쉽게 잠들지 못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눕자마자 졸음이 몰려온다. 서두르지 않고 느린 밤을 보냈다.

책을 만들 적에 입고하던 책방 주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가 만든 책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실로 엮인 겉모습 때문인 것 같다고. 종이를 자르는 것부터 완성되기까지 오로지 손으로만 했기 때문에 정성을 보는 거라고. 필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글씨에 감탄하기만 하고 풀어낸 문장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등 지레짐작. 잘 쓰고 싶다고 했다. 그가 내 말을 가만히 듣다가 해준 말은 ‘그냥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아요’였다. 당시에는 앞서 말한 복잡한 가설에 동의했지 싶어서 더 울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이었는지 알게 됐다. 가볍고 담백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냥’ 써보고 계속 써보고 끊임없이 덜어내는 시간을 반복해야 하기에. 힙스터가 없는 거리에서 읽을 글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연스럽게 앉아 해가 눈꺼풀 위를 무겁게 누르며 몸 안에 차 있던 공기를 조금씩 빼는 시간을 즐기는 것뿐이다.

사회화가 됐지만 여전히 독특한 물건을 찾는다. 특히 회사가 아닌 밖에서라면 더욱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한차례 지나간 뒤 맛이 없던 커피를 대체할 입맛에 맞는 고소한 커피를 들고, 어제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던 빈티지 가게에 다녀왔다. 어제는 굳게 닫혀 있던 특이한 자유곡선 모양의 손잡이는 내게 어서 오라는 듯 안을 향해 휘어 있었다. 복잡한 듯하지만 나름의 기준으로 정리된 소품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화려한 패턴이 가득한 곳에서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 때가 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시선이 가고 마음에 남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확실한 취향임을 알 수 있다. 가게에서 단 한 벌밖에 없는 셔츠를 데리고 나왔다. 그나저나 손잡이는 어디서 났을까.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줄곧 탐난다.

배부르게 먹고 바람이 부는 바깥을 보고 있으니 잠이 온다. 가게를 제외하고는 인적이 드문 곳에 트램만 일정한 간격에 맞춰 지나간다. 근처 카페에서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집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종이컵에 몇 모금 흘러내린 커피 자국이 말라 연해졌다. 그리고 눈을 떴다. 오래 잔 것도 아닌데 개운하다. 평소에 바쁘게 지내다 보니 이럴 때라도 느긋하고 싶다. 다시 움직일 힘이 생긴다. 호스트에 대한 후기를 남겨야겠다. 고된 하루에 ‘틈’을 만들어준 집이라고.

계절이 변하면 나무는 몸에 무늬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오래도록 두텁게 쌓인 결은 단단하면서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시간과 시간이 겹쳐 생긴 테두리는 나무를 더욱 유연하게 한다. 크면 클수록 나무가 되고 싶었던 나는 나이테와 같은 텍스처가 나에게도 남았으면 한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삶을 유연하게 하고 껍질을 더욱 단단하게 할 무늬. 고맙게도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잘리면 어떡하니 등. 하지만 ‘아프니까 하루 쉴까’ 하는 마음과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을
접어서 차곡차곡 모은 휴가다. 농도 짙은 시간을 보내려고 소중한 하루들을 모았고, 이번 여행을 다녀오려고 1년에 받은 휴가의 1/3을 쏟았다. 그곳에서 보낸 일주일은 인생의 1/3 넘도록 남을 것이고, 데려온 물건들은 한평생 함께 지낼 예정이다. 무엇보다 여행을 끝내고 다시 일할 힘을 얻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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