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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저 1호에게

보이저 1호에게

파란시선-0056이동
류성훈 | 파란 | 2020년 06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8 리뷰 5건 | 판매지수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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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6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19쪽 | 190g | 128*208*8mm
ISBN13 9791187756675
ISBN10 1187756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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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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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줄기에 겨울 금성이 외롭게 고인다 저게 행성이라니, 너의 엎드린 피오르드 사이에서 한 방울도 자유롭기 싫고 아무리 짙푸른 밤도 방뇨의 혐의를 따라 흐르는

얄팍한 대기권 아래서
나는 네 위에 쏟아진 산광성운이었다
조금 비리면 어때 저 높은 항로의 하늘은 누가 보아도 정지해 있고 우리는 그럴 리 없는 쪽에 누워 있는데, 우주풍이 네 허리를 구긴다

빛도 빨아들이는 천체가 있대
질식한 별들을 고향에 보내는 날

다시 만나러 가는 길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길이 같은 종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내 과학은 너의 종교였지만 내 병든 종교에 상응할 너의 과학은 없었다

그럴 리 없기를, 꺼진 제례에 서로의 몸을 떨고 차라리 널 위해 몸을 녹일 수 있는 대기권에 참 오래도 누워 있었으니
빛도 물도 없는 곳까지
식별되지 않는 너를 더듬어 보면서

방전된 배터리를 심우주에 버린다
종점이 없는 역에서
나는 오래 서 있고 싶었다 ***
--- 「글로뷸」 중에서

물통 속에 밤이 퍼진다
내 붓은 차갑게 씻기고

안부라는 건
대개 꿈풍선일 뿐, 눈부신
우주 방사선 속에서

버릴 꿈이 없어서, 널 닮은
연체동물을 그렸다 저 외행성 출신의
물기 없는 입을, 활짝 핀
중력 없는 팔들의 짙푸른 기별을

축하한다
악수하는 법도 몰랐으면서
우리는 늘 몽상이라는 교신 위에서
지구에서의 너를 그렸으니
한때 색색 풍선보다 더 필요했던
날숨을, 더운 붓을 휘갈겨 본다

화장실 창밖이 밝아 오고
벌어진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다
그 금빛 껄끄러움 또한
교신,이라 생각했던 물음을 안고
나는 지금 태양권의 어디쯤을
쫓아가고 있을까 ***
--- 「보이저 1호에게」 중에서

혼이 베개에 묻을 만큼 오래 잠들고 싶던 날
나는 귓구멍에서 내 가려운 잠을 파낸다

모두 뭉근한 불 위에 누웠던 때가 언제였을까
한 이불에서 발을 뻗었을 때가 언제였을까
혼자 왔다가, 혼자가 아니었다가, 혼자가 아닌 줄 알았다가, 혼자가 아니고 싶다가, 결국 혼자가 되는 삶들을 건조대에 널던 오늘은 달과 지구의 공전 거리가 가장 멀었다
행성과 위성이 멀어도지고 가까워도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가족이 살고 있었고

나는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았다
가족의 달에는 가족도, 가족 없는 희망도, 희망 없는 가족도 있으니 우리는 꼭 희망이 없이 살아도 나쁘진 않겠지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오타에 가까울 테니
가령 살아,라고 쓰다 사랑,이라고 쳤을 때 언제든 어떻게든 삶은 실수이고 그래서 아름다워 보였듯이, 내가 글을 쓰는 게 다행인 때가 있었듯이

잠 속에서
잠 밖에서
또는 마지막 이승에서
더 많은 봄이 보고 싶었다 ***
--- 「오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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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훈의 시를 제대로 향유하기 위해선 아득한 우주 공간을 홀로 여행하는 자의 심정이 되어 보아야 한다. 우주라는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고독함을 한 번쯤 느껴 보고 싶은 사람 역시 류성훈 시의 반가운 독자가 될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길에 새삼 종점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있다고 해 봐야 영원히 유예되는 위치에서 상상되는 역, 몽상되는 역. 어쩌면 우주라는 공간 자체가 영원히 “종점이 없는 역”(「글로뷸」)일 것이므로, 홀로 여행하는 자의 우주적인 고독은, 아무리 뻗어도 뿌릴내릴 수 없는 두 발과 아무리 늘여도 가닿을 수 없는 시선으로 헤매는 심경일 수밖에 없다. 안착해야 하는 여기와 도착하고픈 저기가 모두 막막해진 상태에서 그보다 더 먹먹하게 읊조리듯 밀고 나가는 시, 항진하는 시, 그것이 류성훈의 시라면, 거기서 발견되는 풍경은 “아무리 걸어도 마주치지 않을 계절”(「총상화서」)처럼 해갈되지 않는 내면을 앞에 둔 풍경과 같다. 어디를 향하더라도 방랑과 방황이 예정된 그 길에서 미아와 고아와 탕아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날 때부터 고독을 타고난 이 화자들이 때로는 ‘보이저 1호’의 막막한 심경으로, 때로는 우주 소년과도 같은 무구한 마음으로 나직이 읊고 가는 말. 그것이 다시 류성훈 시의 언어라면, 그 언어가 내는 길은 앞으로도 내내 종점을 모르는 길일 것이다. 아니면 “다시 만나러 가는 길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길이 같은 종점”(「글로뷸」)을 두고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어떤 길이든 그 길의 끝에서 한 사람의 기원과 한마디 말의 기원과 한 줌도 안 되는 이 우주의 기원을 쫓아서 멀리멀리 항해해 가는 한 여행자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을 것이다.
- 김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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