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고대의 수학은, 기원전 6세기로부터 기원전 5세기에 걸쳐서 탄생한 그리스 수학에 의해 마치 아침해가 뜨자마자 사라지는 이슬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그리스 수학이라 불린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수학은 제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수학에 실제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리스 초기의 수학자는 모두 예외 없이 이집트, 바빌로니아, 그리고 지중해연안과 아시아의 나라들을 두루 다니면서 수학을 익히고, 그 지식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그리스 이전의 수학이 그리스처럼 완전한 지식 체계를 갖추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원천이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p.20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하나의 원에서 원둘레를 컴퍼스를 써서 그 반지름의 길이로 잘라 가면 정확히 6등분된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이 큰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원둘레를 360등분하면 그 은 60이다. 이것으로부터 바빌로니아인은 60이라는 수를 중요시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각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1회전을 360°로 하고, 1°를 60′(분), 1′을 60″(초)로 하는 것도 바빌로니아의 60진법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하루를 24시간으로, 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누는 것도 바빌로니아로부터다.
- p.28
르네상스기에는 지배 계층인 교회와 그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신흥 상공업 계층 사이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여 낡은 수도원 수학과 새로운 상인 수학이 서로 대립하였다. 중간쯤의 위치에 대학수학이 있었다. 14세기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업에 이어서 피렌체의 은행업이 성대하게 발전하자, 이탈리아 시민은 이 상업을 방패로 교회의 권위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상업산술의 대유행은 당시의 경제활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피렌체, 니스, 베네치아 등의 도시에서 수많은 수학책이 발간되었는데, 이 모두가 상업 산술이었고, 내용이나 문제가 당시 사회의 요구에 잘 맞도록 꾸며져 있었다. 이중에서 보르기(Pietro Borghi)의『산술(Arithmetica)』(1484)이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발행된 이 책은“나는 상인용의 실용수학을 엮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선언대로 여기서는 종래의 로마 숫자 대신에 아라비아 숫자를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에티우스식 중세적인 수론은 이미 말끔히 자취를 감추고 기수법, 계산사칙, 도량형, 분수, 합자셈, 화폐 계산, 혼합셈, 가정법 등으로 꾸며져 있다. 그러나 수도원의 수학자들은 이러한 새 기운과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보수성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에티우스식의 중세 수학을 고수하는 일에 수도원의 일류 수학자들이 정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피보나치의 수학책은 당시의 대학에서 쓰이기에는 너무 부피가 크고 수준도 높았다. 그보다 너무 상업적인 내용이어서 보수적인 대학교수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사실 대학 수학도 수도원 수학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았고, 점성술 같은 미신적 요소가 피타고라스식의 그리스 수론, 보에티우스수학의 테두리 내에서 맴돌고 있었다. 대학의 지배적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스러웠고, 심지어는 국가와 교회를 비판할 정도였으나, 수학에 대한 연구만은 형편없었다. 대체로 대학 창립 당시에는 아직도 과학적인 정신은 길러지지 않았고, 로저 베이컨과 같은 사람의 진취적인 과학사상은 이단으로 취급되어, 그 때문에 심한 박해를 당할 형편이었으니까 말이다.
-pp.151-153
르네상스 시대는 계산법이 발전하였으나 수학 부문은 산술, 대수학, 그리스 기하학, 그리고 삼각법 정도에 그쳤다. 따라서 수학이 본질적으로 발전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수학의 양상이 갑자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큰 특징은 대수학이 차츰 기하학적 요소를 버렸다는 점이다. 기호와 문자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방정식에 관한 일반론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경향과 관련해서 곡선형의 구적 및 접선론, 그리고 데카르트가 기틀을 닦은 해석기하는 그리스 이래의 기하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하여 곡선에 관한 여러 문제를 해석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이를테면, 묵시적으로 아르키메데스의 구적이론에 들어 있었던 극한의 개념은 이때부터 비로소 근대적인 논증방법으로 다루어지고, 수학은 정면으로 변량을 다루도록 근본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제 해석법은 수학의 중심 과제가 된 것이다.
접선이론의 주요 목적은 곡선상의 임의의 점에 접선을 긋는 방법을 따지는 것이며, 또 거꾸로 접선을 알고 곡선의 성질을 따지는 문제도 다룬다. 전자가 바로 미분법이며, 후자의 경우가 적분법이다. 이 둘을 포괄해서 미적분법이라고 부른다.
-pp.223~224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