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는 예수 자신의 자기 이해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희소하다는 회의론을 신봉하는 전통이 두 세대 전부터 존재해 왔다.???하지만 우리는 예수의 메시지 가운데 예수가 직접 말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음을 보았다.???따라서 적어도 우리는 나중에 사람들이 예수에 관하여 가졌던 믿음들은 예수가 말씀하셨고 행하신 것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그리고 남아 있는) 것들에 든든히 뿌리박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말하는 예수가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는 예수의 확고한 뿌리다.
--- p.51, 「1장 예수가 말하는 예수」 중에서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은 예수가 사역 하시는 동안은 물론이요 그 직후에도 곧장 글로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30년 내지 40년 동안 기록되지 않았다 하여 예수가 행하신 일과 가르치신 것에 관한 기록이 사라지거나 잊혔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공관복음 전승이 제시하는 증거는 사람들이 예수가 행하시고 말씀하셨다고 기억했던 것을 담아 놓은 기록이 다양한 형태와 조합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회람되었으며 전해졌음을 일러 준다.???예수가 가르치시고 행하셨던 것의 특성은 다양한 형태를 띤 예수 전승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라는 말이야말로 공관복음 전승이 지닌 이중 특성을 잘 요약하는 표현이다. 요컨대, 예수 전승은 두 방향?예수가 당신의 첫 제자들에게 남기신 인상/영향, 그리고 예수의 사역에 관한 기억들이 새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서로 다른 여러 방식으로 전달된 점?에서 분명한 인상을 남긴다.???마가, 마태, 그리고 누가가 말하는 예수는 분명 같은 예수로서 등장하지만, 바로 이 같은 예수가 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상황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초창기 교회가?예수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법으로서 용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만 있다는 인상을 풍기면서, 그의 가르침을 바르게 보존하고 전해 줄 방법은 오직 하나만 있다는 인상을 풍기면서?한 복음서만 소중히 여기고 보관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고맙게도, 교회는 처음부터, 특히 예수의 사역이 제시하는 호소의 다양성을 보존하고자, 그 사역을 다양하게 들려주었다.
--- pp.87-89, 「2장 마가, 마태, 누가가 말하는 예수」 중에서
요한이 묘사하는 그리스도는 영지주의자에게 아주 호소력이 있었다.???실제로 요한복음에는 영지주의의 관점과 동일시할 수 있는 내용이 아주 많았다.???[그러나] 요한복음은 분명 이렇게 강조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육이 되었다”는 영지주의자가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영지주의자는 육과 영을 상극으로 여겼다. 육과 영의 간극은 결코 메울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 곧 “말씀이 육이 되었다”는 것이 요한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말해, 요한은 성육신이 역사이며 사실임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강조한다. 요한이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중심 의미를 제시하는 방식도 사실은 같은 취지를 강조한다. 육이 되신 로고스는 그저 육을 입은 것처럼 보인 게 아니라, 실제로 육이 되셨다. 그는 그냥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게 아니라, 그 전에 먼저 돌아가셨다. 그는 실제로 돌아가셨다! 다시 말해, 요한은 육과 영이 결코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자에게 이 복음서를 더 매력이 넘치는 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 복음서를 대단히 중요한 근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요한은 오히려 정반대로 그의 복음서를 바로 그런 영지주의식 해석의 위험에서 보존하려고 한다. 가현설이 부인하려 했던 것, 곧 영원하신 말씀이 실제로 육이 되셨으며 그의 죽음도 사실이라는 것이 바로 요한이 강조하려 했던 것이었다.
--- pp.119-21, 「3장 요한이 말하는 예수」 중에서
사도행전에도 어떤 단일 복음, 말하자면 예수가 늘 제시하신 것과 공통된 복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행전이 다시 만들어 낸 여러 상이한 설교에서 늘 견고한 핵심 하나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초창기 교회의 예수 선포에서, 적어도 누가가 제시하는 예수 선포에서, 기본 또는 핵심을 이루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어떤 줄거리를 인식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가장 기본을 이루는 요소이며 가장 흔히 나타나는 요소는 이렇다.ㆍ예수의 부활을 선포함, ㆍ이 선포에 대한 반응을 요구하면서, 회개하고 이 예수를 믿으라고 요구함,ㆍ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에게 용서와 구원, 그리고 성령이라는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 (사도행전이 제시하는 복음은) 예수를 분명하게 제시하며, 복음 제시에서 드러나는 유연성(같은 복음을 제시하면서 다르게 제시함)이 잘 나타난다.
--- p.154, 「4장 사도행전이 말하는 예수」 중에서
우리는 후기 바울서신이 훨씬 더 넓은 청중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를 철저히 다시 정의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더 순응하는 사람으로 바뀐 바울을 본다. 그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원만하게 다듬었고, 그의 교회론은 더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게 되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통제에 순응하는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의 철저함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넘어 멀리 퍼져 나간 것은 분명 그런 그의 영향이었다. 종종 예리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그의 서신은 그가 그 서신을 쓴 대상인 특정 교회를 넘어 널리 모든 이에게 늘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분명 간주되어 왔다. 그 때문에 십중팔구 그의 서신은, 예수의 사역을 담은 기록과 더불어, 신약성경?기독교 성경의 시초?이 된 정경 속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첫 번째 후보였을 것이다.???그가 평생을 바쳐 완수한 선교에서 드러나듯이, 오래된 경계를 허물고 돌파했던 이, 성령이 부어 주시는 생명이 오늘날 기독교에 아주 크게 이바지하는 새로운 형태, 새로운 공식으로 계속하여 끓어 넘치고 폭발하게 만든 이가 바로 바울이다.
--- pp.217-18, 「6장 바울이 말하는 예수: 2부」 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장 분명히 밝힌 텍스트가 바로 히브리서가 아닐까 싶다. (1) 예수의 제사장직은 유일무이하고 독특하며 되풀이될 수 없다. 오직 “시작한 날도 없고 삶의 끝도 없는” 이만이 그런 제사장이 될 자격이 있다. 곧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수행할 자격을 가진 자만이 그런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이는 예수뿐이다. (2) 예수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예배하는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 곧바로 직접 다가갈 수 있으며, 제사장의 중개 역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가 행하신 역할의 필요성은 이제 끝났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논지?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하는 이는 제사 장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직접 다가갈 수 있다는 것?가 자아내는 경이요 흥분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가 변함없이 가져온 중요한 의미다! 다소 슬픈 일이지만, 여전히 제사장의 중개를 요구하고 그런 중개에 의존하는 예배 체계로 돌아가는 것은 히브리서를 배척하는 것이요 히브리서를 사실상 신약성경에서 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p.235. 「7장 히브리서가 말하는 예수」 중에서
복음서와 바울서신이 지배하는 신약성경에서는 공동서신의 가치를 간과하기가 쉽다. 주일마다 성경에서 서너 본문을 읽는 교회조차도 야고보서, 베드로서신, 요한서신, 그리고 유다서 본문은 죽 이어지는 설교나 묵상에서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서신들은 기독교를 세운 세대가 가졌던 넓이와 깊이를 되새겨 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 서신들이 없으면, 예수가 미친 영향에 관하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내용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삶과 사역, 그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기억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과 증언과 사역에 다양한 방식으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제한된 범위에서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교회는 공동서신을 상당히 무시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서신들은 기독교가 처음부터 가졌던 풍부한 다양성을 표현하고 생생히 구현한다. 따라서 이 서신들을 늘 파고들지 않으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많이 빈곤해질 것이다.
--- p.269, 「8장 야고보서, 베드로서신, 요한서신, 유다서가 말하는 예수」 중에서
우리는 요한이 받은 계시가 그리스도를 묘사하거나 언급한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는 어린 양이 아니었다. 문제는 오히려 예수를 어린 양으로 묘사한 것이 묵시 시나리오 안에서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를 각기 다르게 언급하는 모든 표현을 서로 연계하려 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일관된 단일 기독론으로 통합하려는 일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각기 다른 환상들이 보여 주는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거나 어떤 단일 이미지로 통합케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고 추측해서도 안 된다. 기독론과 관련하여 정말 중요한 한 가지는 요한이 묘사하는 환상들이 예수를 거듭거듭 교회가 당면한 위기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열쇠이자 이런 위기를 성공리에 해결하는 데 필요한 소망의 중심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부 내용?다양한 환상이 제시하는 세부 내용은 때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이 아니라, 예수가 언제나 소망의 중심에 계신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갖가지 위기도 그리스도를 향한 요한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요한이 이런 위기를 꿰뚫어 보고 이 위기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예수는 늘 요한이 표명하는 소망과 확신의 중심에 계셨다. 그것이 “요한이 말하는 예수”의 핵심이다. 예수는 현세가 우리에게 던지는 갖가지 위기의 와중에서도, 우리가 그런 위기를 통과할 때도, 언제나 소망의 초점, 확실한 소망의 초점이시다.
--- p.288, 「9장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예수」 중에서
나는 다시금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말하는 예수”는 어떤지 묻는다. 우리는 다?신약성경 저자들이 다 달랐듯이?각양각색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증언도 각양각색임은 당연지사다. 이런 증언은 그야말로 멋진 심포니(나는 일부러 심-포니sym-phony라는 말을 썼다)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만들어 낼 것이다. 이 세대 사람 대다수는 예수 이야기를 그저 과거지사, 그것도 먼 과거의 일로 치부하지만, 이런 세대에게도 그런 심포니라면 아주 신선한 도전이요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말하는 예수! 여러분이 그 일을 해보지 않겠는가?
--- p.290,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