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췌장암 선고를 받고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견디며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온몸의 기력을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열정적으로 환자 진료에 매진하다 2018년 9월 4일 불꽃 같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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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3개월 남짓의 투병 생활을 도왔던 내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아준 적 없던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당신 또한 내 우주였고 내 전부였습니다. 투병 중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환자를 돌보며 심신이 지쳐 있었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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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직업과 취미 그리고 삶의 목표에 관한 생각도 명확했다. “인간은 사회적, 경제적 동물이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아.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고 자기가 좋아하는 건 취미로, 잘하는 것은 직업으로 삼으면 좋지 않겠어? 돈도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그저 취미라고 하기엔 아까울 만큼 그 사람은 잘하는 게 너무 많았다. 하모니카와 기타는 학창시절부터 시작해 수준급이었고 낚시, 바둑, 장기, 정원수 전지, 요리, 전기공사, 식물 가꾸기 등 여러 분야에 능숙했던 그는 소위 말하는 ‘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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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말만 하고 약도 잘 권하지 않는 한의사로 유명했던 그 사람에게 어떤 환자는 대놓고 말도 안 되는 불평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침을 한 번만 맞아도 다 나았다는데, 왜 나는 여러 번 맞아도 차도가 없는 겁니까?” 누가 들어도 황당한 이 질문에 그 사람은 당당하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병증이 심해 다른 병원을 전전하다 막차 타고 오신 분까지 단번에 낫게 해줄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면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지는 않았겠죠.” 이렇게 마음을 답답하게 한 환자가 있었거나 진료를 많이 보았던 날에는 남편이 “명바라, 집에 가서 막걸리나 한잔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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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서 자료를 모두 뽑아다 회계사 통해 정리해 세무서에 넘긴 날 세무서 직원이 “큰 아드님 내외분이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으셨나 보다.”라고 말했다. 가산세가 붙어 일반 가정에서는 흔치 않은 금액의 세금을 모두들 냈다.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어머님이 내가 돈 욕심이 없어서 예뻐하신 거였네. 돌아가신 형님 대신 조카들 챙기신 건 이해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돈을 받았으면 상속세는 제대로들 낼 것이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독종 양기호 씨! 당신 형제들도 별 볼 일 없네!” 작정하고 속을 건드렸지만, 할 말이 없었는지 그 사람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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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가는 날이면 우리는 첫차를 타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준비해야 했다. 아마 아픈 남편에게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거다. 서울로 가는 동안 나는 늘 맘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했다. 이번에 병원에 가면 더 좋아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서울에서 진료받고 순천에 돌아오면 자정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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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날이 갈수록 더 예민해지고 말이 없어졌으며, 나는 그런 그 사람이 더 어려워졌다. 10월에 다시 서울대병원에 갔고,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항암치료는 안 받겠다고 했지만, 이미 오더가 떨어져 약이 들어왔다. 이번엔 몸이 힘들어서 쉬고 다음번에 하겠다고 한 거였는데 김 과장님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었던 것 같다.
결국 항암은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내려왔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남편은 다음 날 변함없이 한의원으로 출근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기다리는 환자가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진료할 거라 했다. 남편의 실력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번졌고, 방까지 잡아가며 타지에서 오는 환자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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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바라’는 ‘명희만 바라본다’는 의미로 ‘보리’와 함께 남편이 나를 부르던 애칭 중 하나였다. 세차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나는 그 달달했던 순간까지도 잊고 살고 있었다. “세상에 나 같은 놈이 어디 있다고……. 넌 왜 나한테 고맙단 말 안 하냐?” 말은 안 했지만, 그 사람은 나에게 자랑스러운 남편이자 인생 선생님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빠였다. 그 당시에는 그런 사람이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다른 낭만 섞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하루하루가 긴장되고 바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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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몇 분이 다녀간 일요일 오후 면회를 들어간 나와 사촌형님에게 그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했다. “기호 간다, 명희야!” 너무 작은 목소리라 우리가 혹시 못 알아들었을까 봐 그는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해 ‘명희, 가! 가!’라고 써주고 손가락 세 개를 힘겹게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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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보낼 수 없었다. 양기호, 내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 아픈 몸으로도 나를 철옹성처럼 지켜 주었고,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며 강인한 정신력으로 기적처럼 내 옆에 있어 줬던 사람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이 없던 나에게 끝없는 신뢰감과 사랑을 주었지만, 어느 순간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어졌었던 내 인생 단 하나의 사랑. 미안하고, 사랑하고, 고마웠던 그 사람만 살릴 수 있다면 난 대신 죽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 먼저 보내고 싶지 않아 홀로 먼 길을 떠난 것 같다. 2018년 9월 4일, 그렇게 그는 가버렸다. 내 생각은 항상 건강한지, 영혼은 제자리에 있는지 생각하면서 잘 살다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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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꿈속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방으로 오셨고, 어머님이 이제는 기호를 그만 놓아주라고, 기호는 여기 없다고 하셨다. 난 다음 날 바로 산소로 달려가 울며 소리쳤다. “어머님이 그렇게 아끼던 큰아들 데리고 가시면서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해주시더니 이제 이곳에 없으니 그만 잊으라고요? 어머님 저 진짜 예뻐하고 사랑하신 거 맞나요? 차라리 저랑 아픈 제 아들을 데리고 가시지, 왜 아까운 사람을 데리고 가셨나요?” 원망스러운 마음에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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