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40대 중반의 남자와 나눈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는 두 번째 결혼 생활이 파탄 났고 회복될 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는 십수 년간 이름 있는 금융 기관에서 근무했으며, 상당히 성공한 편이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앞으로 30년이나 4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감에 빠진 얼굴, 텅 빈 눈동자를 갖고 있다.
“아침마다 나는 간부 식당에 가서 회사의 최고 직위에 있는 여섯 명과 함께 식사를 하죠. 그들과 동석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요. 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치길 은근히 바라지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에는 내가 어딘가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침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고 여섯 명은 함께 엘리베이터로 가고, 나만 홀로 뒤처져서 따라가지요.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다음에는 그들은 모두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는 다른 걸탑니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들 중 하나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들과 같다는 것은 순간적인 착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친구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나는 이런 제안을 했다. “한 45일간 시간을 내어 자네 인생의 건축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전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게 어때?” 그는 “그건 가능하지만 어떻게 시작하지요?”라고 물었다. “세 단어야”라고 내가 대답했다. 내가 그 단어들─떠나라, 따르라, 뻗어 나가라─을 말하자 그는 받아 적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에게 이 책에 관해 말했다.
--- p.17
우주 탐험의 세계에서 궤도 수정은 우주 비행체가 의도된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방향을 정교하게 조정하는 작업이다. 이 책에서 중간 궤도 수정은 성경적인 사람의 영적 삶을 재생시키고 방향을 수정하며 다듬는 것을 일컫는다. 이는 광범위한 과정으로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이제 나는 인생 육십 줄을 넘어서고 있다. 아울러 성품, 습관, 개인적인 행위 등에서 방향을 바꿔야 할 면들을 여전히 보고 있다. 이건 그리 우려할 바가 아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정련하는 것이 생명력과 장수의 비결임을 새로이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다.
--- p.20,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중에서
나는 많은 이를 염두에 두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전투 때문에 자신의 생생한 낙관론, 믿음의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나는 이같이 전투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동반자로 여기는 심정으로, 인생을 새롭게 하기 위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심사숙고하려 한다.
이 주제에 대해 가장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마 총에 맞고(그들이 표현하듯이) 실패하고 넘어지고 생을 망친 이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중간 궤도 수정을 되돌아오는 문제로 생각하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아해한다. 자신을 곤경에 처넣은 삶의 패턴과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까? 과연 참으로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많은 이가 불가능하다고 대답하고픈 충동을 느낄 것이다. 사실 인생의 어떤 중대한 시점에서 더 깊고 더 넓고 더 영적인 삶을 개발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인식하게 된 과정을 깊이 숙고하지 않은 채 변화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내던져 버린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일종의 어리석음이며, 인생을 변화시키는 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과는 분명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중하게 말하는 바다.
나는 중간 궤도 수정이라는 상징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할 터인데, 이것은 인생의 어떤 시점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삶의 변화를 꾀하려는 우리의 모습을 지칭한다. 나와 함께 이어지는 장들에 담긴 잡다한 생각을 따라 여행하고 나서 당신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길 바란다. 당신에게는 중간 궤도 수정이 어떠한 것인가?
--- p.24,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 중에서
모세는 젊은 시절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에 불탄 나머지 애굽 군인을 죽였다. 그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짓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40년이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운 다음에야 다시 행동의 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상한 인물인 발람은 듣는 법을 몰라서 당나귀에게 당한 후에야 하나님의 음성에 귀가 열렸다. 엘리는 장래의 선지자 사무엘에게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응답하는 법을 훈련시켜야 했다. 유나는 들으려 하지 않다가 엄청난 고난에 빠졌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경험함으로써 구속 이야기에서 자신의 큰 역할을 알게 되었다.
--- p.99, 「신앙 여정을 거꾸로 따라가면」 중에서
우리는 종교적인 영웅들이 거의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다. 성경 기자는 우리처럼 정념과 잘못과 결점과 의심과 두려움을 가진 인물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과거에나 현재나 사람들을 영광스러운 지위로 떠받드는 것은, 당사자에게나 우리 자신에게나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깨어진 존재로 태어났으며 일평생 그런 상태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삶의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애쓰는 모든 이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 p.158, 「믿음의 상처」 중에서
성품 변화의 시작은 그리스도라는 중심점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원 개념에는 사람들의 성품이 성숙하도록 강권하는 요소가 없다. 일단 경계선을 넘어 원 안에 있게 되면, 굳이 숨은 생명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중심점이고 그분이 우리게에 더욱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면, 날마다 점점 더 변화될 의욕이 생기게 된다. 우리가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중심에 계신 그분을 점처 더 닮아 가게 된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의도적으로, 전략적으로-평생에 걸쳐 이룰 개인적인 사명이 된다.
만일 내가 지나치게 이 점을 강조했다면, 성경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가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 너무나 많은 사람이 변혁이란 몇 가지 행동, 몇 가지 어휘, 몇 가지 일정, 심지어는 몇몇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너무 금세 기뻐한다. 하지만 실은 숨은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마음이 감동을 받아 변화되지 않는다면-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것처럼-진정한 중간 궤도 수정의 가능성은 멀리 사라지고 만다.
--- p.203, 「많은 인형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