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에 동학이 유입된 시기는 1886~1887년경인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창건록』과 여러 사료를 통해 옥천은 1884년 이후에 동학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재벽이 입도한 1887년을 전후한 시기에 동학이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옥천과 청산은 충청도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동학을 받아들였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여 1890년대에 들어와서 관의 집중적인 수탈 대상이 될 정도로 교세가 급신장하였다.
--- p.54-55, 「옥천 지역 동학의 전파와 조직화 과정 고찰」중에서
동학혁명의 역사 연구가 그동안 남접 중심 또는 전라도 전봉준 중심으로 평가되어 오면서, 북접의 입장에 대해서는 온건주의 노선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런 조건에서 충청북도 동학은 동학혁명사에서 변두리 역사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청북도는 창도기부터 동학이 유입되었으며, 동학 포교의 중심으로 장내리에 대도소를 두었고, 1993년 보은취회를 통해 척왜양창의, 보국안민을 내세워 시민운동의 효시로써, 나아가 동학혁명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1894년 3월 전라도 무장에서 동학군이 기포하자 괴산, 연풍, 충주 신당리, 문의, 청산 작은뱀골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기포했고, 9월 18일 재기포령이 내려지자 수만의 동학군이 모여 항쟁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충청북도는 동학혁명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북접 동학군의 주력이 최후의 큰 희생을 치른 비극의 땅이다. 즉, 동학혁명의 시작과 끝이 있었던 중심지였다.
--- p.77-78, 「충청북도 중남부 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중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화된 시점은 해월 최시형의 총기포령을 내린 때(9월 18일)였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날을 계기로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민초들이 동시에 똑같은 구호와 똑같은 이념으로 똑같은 지휘 체계 하에서 일사분란하게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을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라는 구호를 주장한다면 그 첫 단추인 전국화가 실현된 일자와 장소가 명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충청도 옥천은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지역이다. 산과 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주민들 역시 무거운 입을 가졌기에 비밀리에 추진되었던 보은취회나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옥천에서 1년 이상을 거주한 해월 최시형은 단 한 번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 않았고 또 서둘러 보따리를 메고 달아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옥천은 해월을 보듬어 주었을 뿐 아니라 동학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 p.117, 「옥천의 동학농민혁명과 청산기포의 의의」중에서
옥천 지역은 보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서 중요한 곳이다. 보은은 보은집회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며, 옥천은 1893년 10월부터 약 1년 동안 최시형이 기거하면서 동학교인을 통솔한 곳이다. 옥천의 동학농민군들의 움직임은 1894년 3, 4월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옥천을 포함한 충북지역 출신의 동학농민군들은 전라도 내려가 전봉준부대에 합류했던 것으로 보이며, 4월 중순 이후 대부분 해산하였다. 이 시기부터 옥천의 동학농민군은 인근 지역의 동학농민군들과 호응하면서 활동하였고, 최시형이 있던 청산리를 중심으로 동학교인들이 세력을 넓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략) 최시형은 9월 18일 옥천에서 총기포령을 내렸고, 옥천의 박석규를 비롯하여 옥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접주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의 첫 활동은 10월 2일로 확인된다. 10월 19일경부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 p.139, 「옥천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진압군 활동」중에서
갑오(1894)년 만추 전봉준의 호남우도 동학군과 손병희의 호서동학군 갑대는 연합해서 공주성 진입작전을 2-3회 시도하다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무참히 패했으나, 정작 대청지역에서 그들을 돕는 위치에 있던 호서동학군 을대는 탈취한 후장총으로 무장한 이종만 별동대를 선봉으로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여 곳곳에서 선전했다.208 그들은 그해 봄 동학혁명운동과 9월 하순 청주성 전투에서 익힌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10월 6-7일 괴산 전투와 24일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했고, 다시 26-29일 문의부근 지명 전투와 증약부근 마달령 봉계곡 전투에서 지형을 이용한 뛰어난 기만전술로 중로군 지대를 격파했다.
--- p.200, 「동학혁명운동 당시 금강 중상류 척왜항전」중에서
옥천 청산 지역은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포덕하거나, 동학교도에게 동학의 교리를 강설했던 곳이다. 보은 장안에 있던 대도소와 더불어 청산 문바위골은 최시형이 머물며 교단의 주요 문제를 결정하던 중요한 곳으로 작은 장안이라 불릴 만큼 많은 동학도들이 방문하던 곳이기도 하다. 문바위골은 최시형이 9월 18일 재기포령을 내렸던 역사의 현장이며, 백범 김구도 그 시기에 이곳을 방문하여 접주 임첩을 받고 재기포령을 직접 듣기도 했다. 또 1894년 말 공주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들이 남원까지 후퇴했다가 소백산맥을 따라 장수, 무주, 영동, 황간을 거쳐 북상할 때 문바위골에서 전투를 벌인 사실도 중요하다. 특히 9월 재기포 이후에 옥천-청산 지역에서는 관-일본군, 민보군에 의해 많은 동학농민군이 포살되었다.
--- p.222, 「옥천 지역 동학농민혁명 스토리텔링과 문화 콘텐츠 활용 방안」중에서
정순철(鄭淳哲)은 윤극영과 함께 우리나라 어린이 동요운동의 선구자이다. 또 정순철은 방정환, 정병기, 손진태, 진장섭, 고한승, 강호, 조준기 등과 함께 색동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1929년 동요작곡집『 갈닙피리』를 발행하였으며 여기 수록되어 있는 [우리 아기 행진곡](뒤에 [짝자꿍]으로 제목이 바뀜)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부르던 동요이다. 해방 후에 그가 작곡한 [졸업식 노래] 또한 학교를 다닌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다 불러 본 노래이기도 하다. 정순철은 1930년에는 정인섭, 이헌구와 함께 녹양회(綠陽會)라는 동요동극 단체를 만들어 「색동저고리」, 「백설희」, 「에밀레종」, 「허수아비」 등의 동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방정환과 가깝게 지내며 초기 어린이운동을 이끈 어린이운동, 동요운동의 선구자다. 그런데 이런 인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정순철이 6.25 전쟁 중 납북되면서 이름과 행적이 매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 p.269-270, 「어린이 노래운동의 선구자, 정순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