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거나 일상적인 오브제와 상황을 예술적 전이(transfer)를 통해 새로이 조망하고 평가하고자 하며, 이로써 새로운 사고와 경험의 지평을 열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시장에서 관람 가능한 결과물로 이끄는 작가의 지적 사고 과정이다. 사람과 경험의 미묘한 현존과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기묘한 관계의 독해는 지적 사고 과정의 연원이나 발상을 파악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작업의 토대인 통찰과 발상을 실어 나르는 데 필수적이다. 작품 제목은 흔히 의미의 다양한 맥락에 대한 유희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상황에 관한 기술, 특이한 단어를 만들어내는 일, 대립항의 선택은 아직 탐험해보지 않은 사유와 가능성의 공간에 대한 양혜규의 관심을 드러낸다.
--- p.19, 아냐 카서, 「가능성은 미니멀에 잠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보는가?」 중에서
이번 전시 명칭과 동명인 설치 작품 〈공기와 물〉(2002)에서 표준 체계 역시 수정을 거쳐 본래의 관습적 맥락에서 이탈한다. 작품은 두 개의 자립형 선반장 모듈로 구성된다. 한쪽에는 내부에 아무 선반 없이 외부 틀만 빈 채로 서 있다. 다른 한쪽에는 선반이 너무 촘촘해 무언가를 수납할 만한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두 오브제는 여전히 ‘선반 세트’라는 유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관람객의 관심은 선반의 미학적 존재감 쪽으로 이동한다. 〈공기와 물〉이라는 설치 작품은 또한 언어 경험을 지시한다. 종종 실존적 의미나 형이상학적 의미로 거론되는 공기와 물이라는 개념적 단어의 쌍은 주유소의 대형 네온사인에서도 발견된다. 의미심장한 이 단어가 주유소에서는 상당히 평범한 의미를 담고 있으니, 그저 일상적 물건을 가리킬 뿐이다. [냉각수 혹은 와이퍼에 주입하기 위해 필요한] 물과 [타이어에 주입하기 위한] 공기 압축기를 말이다.
--- p.29, 이자벨 포데슈바, 「공기와 물」 중에서
사진 작품이든, 도시 공간에 개입하는 작품이든 간에, 양혜규의 작업은 재료에 대한 특정한 양면성을 특성으로 한다. 한편에서는 모더니스트적 모뉴먼트를 기념하는가 하면, 비엔날레[라는 대형 미술 전시]는 미묘하게 전복되고, 또 직원 휴게실이라는 ‘비공간’(non-space)은 외부 환경의 권태로운 이미지로 인해 더욱더 안락한 느낌을 얻기도 한다. 이렇듯 전 작업에 걸쳐 ‘주체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의미적으로 장전된 장르나 사건을 중성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구가 표출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적 중성화는 작업의 세부가 낱낱이 관찰될 때 빗겨나가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한 장의 사진 혹은 그래피티가 주는 물리적인 밀접함은 본래의 거리두기의 절차를 부정하게 된다.
--- p.43, 찰스 에셔, 「왜 일상은 그토록 색다르고 감동적인가?」 중에서
사동 집은 이미 기본적인 제도적 조건들?이를테면 문화예술적 인프라가 마련되어 있고, 접근성이 용이해야 한다는 것 등?과는 매우 멀리 있는 장소다. 우연 혹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선택에는 ‘인천, 그중에서도 낙후된 지역에서 전시를 한다’는 묘한 지역적 상황을 부여받게 된 부분이 없지 않다. 처음부터 기존의 미술기관이나 관례적인 전시 공간이 아닌 제3의 공간을 찾기로 했던바, 시내에 비어 있는 오피스, 창고 등을 염두하고 물색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임대료 등도 문제가 되었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건들이 개입되어야만 성사 가능한 것들이 태반이었다. 어떻게 보면 처음 전시를 기획할 때 가졌던 전시에 대한 원칙, 즉 ‘제도적인 조건들이 비껴간 곳을 찾는다’는 원칙에서 시작하다 보니 결국 ‘덜 자본화된 공간’, 나아가 ‘낙후되어 있으면서 다시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될 잠재성이 충분한 공간’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p.52, 김현진, 김장언, 양혜규, 「사동 30번지」 중에서
외로움과 자기 회의는 양혜규의 작업에서 극단까지 나아가, 사건-공간(event-space)의 균열 양쪽에 자리한다. 한쪽에는 욕망, 회의, 충동적 성향처럼 섬약한 주체성의 징후가 있고, 다른 쪽에는 타인을 향해 열려 있으며 위계 없는 보편성이 존재할 수 있는 운명론이 있다. 이것은 나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사건들에 참여하는 것과 참여하지 않는 것?당신의 정체성이 정의(定義) 안팎에서 표류하는 과정?사이에 놓인 간극이다. 현실의 정치 투쟁과 관련해, 만일 내가 공동체, 연대의 관계들을 헤쳐 나가겠다고 자청하지 않는다면, 그 간극은 무관심의 위험을 무릅쓰는 자리다. 여기가 바로 동시대의 삶이 동질화(국가, 경제, 문화)의 통제에 굴복해버릴 수 있는 지연 또는 저항의 위치다. 공동의 존재와 관계 맺지 않는다면, 주관적으로 표류하는 자동 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공간과 사건을 함께 나누는 타인들과 어떤 정동적 연계도 갖지 않는다면, 나는 금방이라도 자아를 비워 그 (멍해진) 주체성을 내가 진심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혹은 타인과 연관된 나와는 무관한 목적에 내어줄 수도 있다.
--- p.78, 라르스 방 라르센, 「공동체 작업?양혜규 예술의 공간과 사건」 중에서
산만한 탐구, 부적합성과 불완전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은 우울과 멜랑콜리의 심리적, 사회적 차원을 적극적으로 추적하는 가운데 펼쳐진다. 하지만 이 불완전함을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일종의 생산적인 힘으로, 이를테면 미완성을 동기유발의 자극으로, 실존을 위한 연료로 특징짓고자 한다. 그렇게 작가는 그 무연관성의 정서적인, 다치기 쉬운 상태를 포용하는, 이성을 넘어선 영토로 나아간다. 최근 필자에게 말했던 것처럼, “어떻게 고립되고 단절되어 있는 작업 조건을 극복할 수 있고, 또 어떻게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맺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파편화된 일개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존재를 인정하고, 나 자신을 세계에 관여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다짐할 때마다 내게 강력한 힘을 주는 것은 바로 그 다치기 쉬운 감정이다.” ‘자기 집’과 ‘자기 집 아닌 것’ 사이에 공간적이지만은 않는 거리가 작업을 통해 교섭된다. 상호존중의 공동체 모색이 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바다.
--- p.93, 주은지, 「어떤 만남」 중에서
조각가로서 양혜규는 모으고 뜨개질하고 묶고 결합하고 접고 펼친다. 우리는 작업에서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정리하고 싶은 욕망을 관람자로서 갖게 되는데, 당연히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물론적 분석으로는 작가에게 과연 궁극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에 충분히 다가가기가 힘들다. 소재에 적용하는, 즉 모으고 뜨개질하고 묶고 결합하고 접고 펼치는 행위를 자신이 지적으로 참조하고 집착하는 대상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그는 ‘아마추어의 용기’로 여러 역사와 전기 사이를 드나든다. 나는 양혜규가 흰 눈이 쌓인 산봉우리와 어둑어둑한 골짜기로 구성되는 역사의 지형을 가로지르는, 즉 통속적(exoteric) 유물론과 비교의(esoteric) 정신주의로 이루어진 풍경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시도에서 도교의 ‘축지법’과도 유사한 차원 넘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 p.174~175, 정도련, 「운동 연구」 중에서
양혜규의 작품에는 분명 그 자체의 시학(詩學)이 담겨 있지만 순수 추상은 결단코 지양한다. 작품의 구성 요소는 종종 집안 살림 등 시종 평범한 것들이고, 그 일상의 오브제가 개별 작품의 ‘하드웨어’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물리적이고, 그래서 감각적인 언어다. 작가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오브제 사용의 유추(analogy)는 주기적으로 동일한 패턴의 화음으로 회귀하는 작곡가일 수도 있다. 그러한 오브제의 지속적인 사용을 통해 작가는 일상적 사물의 물리적 신체를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기이한 공감, 심지어 동정심마저 드러낸다.
--- p.188, 앤 M. 와그너, 「차폐 기억과 일상 오브제」 중에서
소피 토이버아르프는 무용, 자수, 직조의 ‘비주류적’(minor) 본질을 예술적 활동이라고 상정하고, 이에 대한 인정을 단호하게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이러한 [비주류적] 예술을 미학적 실험의 벡터로 삼았고 그 결과로 회화라는 최고로 ‘고고한’ 장르가 풍요로워졌으며, 이는 추상의 선구자 중에서도 토이버아르프에게 특별한 자리를 안겼다.1 양혜규와 토이버아르프는 공통적으로 이 ‘비주류’를 명백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토이버아르프가 선언한 비주류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신뢰를 잃은 ‘주류의’ 영웅적이며 남성적인 상(像)에 분명하게 대항한 반면, 양혜규와 관련해서는 ‘적’이나 ‘대항 모델’을 분별해내기가 어렵다. 여러 의미에서 양혜규의 ‘탈중심’에 관해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p.201, 파트리샤 팔기에르, 「오베트에서의 무용 수업」 중에서
양혜규가 싱가포르 타일러 판화 연구소에서 체류하며 제작한 작품의 단순한 노동을 울림 있게 복합적으로 증언하는 소박함의 자기 선언인 것이다. 이 작품들이 기념비적이거나 변형적인(transformative) 화면을 거부하는 ‘주변적인’ 작품으로만 보일지 몰라도, 생각 없이 아름답기만 한 스펙터클의 창조를, 경력 시작 이래로 내내 거부한 작가의 일관성을 우리는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 세계에 머무는 사물의 어떤 존엄성일지라도, 그것은 만들어지는 과정과 역사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정정당당하게 존재한다.
--- p.287~289, H. G. 매스터스, 「날것이지만 감상적이지 않은 존엄」 중에서
양혜규는 예술이 인간과 비인간의 이행 지점을 표현한다고 보는 작가 세대에 속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주체다. 그것은 보편적 주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서, 사물이나 생명체에 동등한 주체의 지위를 부여하고,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형식적 네트워크에 함께 짜들어간 개별 요소에도 ‘인격성’을 인정해준다. 그러므로 오브제/객체라는 개념은 결국 폐기된다. 작가의 언어 활동에 의해 세계에 존재하는 요소들 전체가 연결되고, 주의 깊게 보면 모든 것이 말하거나 몸짓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사용한 모든 재료, 그러니까 작품에서 규칙적으로 불쑥 등장하는 생물 또는 무생물의 존재들은 다중(multitude), 즉 인구(population)를 형성한다.
--- p.309, 니콜라 부리오, 「펼침의 경험?양혜규와 당대의 조각」 중에서
전 지구적 자본의 재촉에 떠밀려 가족과 떨어져 있는 남성들은 때로는 수년 동안 온전히 혼자다. 양혜규는 이 남성들과 자신의 아버지 세대가 경험한 조건 사이에 어떠한 등식도 거부하지만, 아랍 에미리트에서의 현존과 고향에서의 부재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심원(深遠)함을 감지하면서 직관적으로 샤르자예술재단의 제작팀, 문화유산부, 그리고 현지 도급 업체의 남성들과 관계 맺는다. 〈불투명 바람〉은 작가가 예술적 존재로서 이른바 중동과 한국의 산업 발전에 의해 빚어진 불가지한 지리경제적 역사를 대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 p.322, 주은지, 「아버지들의 방」 중에서
배운 것을 잊음으로써 배워가는 과정은 양혜규의 예술에서 보이는 신중성과 즉흥성 사이의 창조적 긴장에 내재되어 있다. 이는 특정한 구조적 개념들에 대한 해석을 전문적 제작자들에게 넘겨줄 수 있는 양혜규의 능력뿐만 아니라,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연작에서 분명히 드러난 브리콜라주 미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가 뿌리 공예나 분재 같은 이른바 취미 예술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설명해준다. 이렇게 생각을 물질적 형태로 표현하는 것은 양혜규의 초기작 중 하나인 〈전환하는 삼인자三仁者-三因子〉(2008)에서 시적으로 나타나는데, 고형체를 추상화한 지구본에서부터 기하학적인 종이접기 다면체에 이르기까지 구체(球體)에 관한 사진 235장이 무한 반복하는 이 작품은 질서정연한 것과 물질적인 것, 상징적인 것을 망라하는 하나의 스펙트럼 안에서 지식의 각기 다른 의미역(register)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 것이다.
--- p.350, 수잰 코터, 「불투명 바람이 부는 육각 공원―흙, 바람, 불에 관하여」 중에서
틈새로 쉽게 들여다볼 수도 없는 까닭에, 우리는 구조물 안에 일부 감춰진 실내, 모종의 비밀을 간직할 뿐인 내부 공간을 추정할 뿐이다. 동시에 구조물은 우리를 밀치고 우리의 몸으로 되돌아와 우리를 내다보며, 구조물로 인해 관객은 응시의 대상으로 전도된다. 타틀린에서 미니멀리즘으로 발전된 모더니즘 형식은 이렇게 채택되어 도전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작품에서 솔 르윗의 투명한 우리(cages)는 모호한 어법의 특성을 띠면서 오래도록 양혜규의 조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 p.387, 톰 맥도너, 「 모호한 어법의 조각」 중에서
자연은 양혜규의 작업의 주제가 아니다.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시절에 시작된 초기의 작업에서부터 그는 감각적인(sensual) 것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면서, 후기근대성(late modernity)에서 물려받은 감각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바꾸고자 했다. 감각은 작품의 소재뿐만 아니라 작가적 문제 제기에서 발산한다. 작품의 소재 및 형태가 경험에 관한 상상을 전달하는 방식에 감각적인 것의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 p.393, 추스 마르티네스, 「자연은 숨는 것을 좋아한다」 중에서
양혜규는 자신과의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아 서구 아방가르드라는 전통을 멀리하고 다루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2013년 즈음, 소피 토이버아르프의 작업에 이끌려 작가의 이런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토이버아르프의 교차 학문적 실천은 양혜규처럼 여러 매체와 소재를 포함하는데, 퍼포먼스, 추상 회화, 직조, 자수, 구슬 공예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현재 양혜규의 충정을 훔진 인물은 로즈마리 트로켈이다. 2014년 “그의 작품에 너무 끌린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필적할 사람이 거의 없다.” 거의 동시대인인 두 작가를 잇는 제일 명백한 고리는 가사적인 것에,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젠더화된 양상에, 노동과 수공의 문제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 p.458, 린 쿡, 「정체성의 수행, 미학의 세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