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장소는 중요하다. 기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의미를 지닌 장소는 그야말로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자체인 예배당, 그곳에서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요 아픔 자체이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본서에서 특별히 다룬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도 마찬가지다. 터키와 그리스는 복음의 확산지이다. 바울과 그의 전도팀의 열정이 그대로 녹아든 곳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곳을 밟는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잊혀진 하나님나라를 기억하는 것이요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 그 자체다. 지금은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하나님나라를 되찾게 해주며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회복시켜주는 ‘그 장소’로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작은 바람은 이 책으로나마 그 숨결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바울과 함께 걷는 즐거움을 전달해주고 싶다. 답답한 코로나19의 시기를 이 책을 통해 견딜 수 있으면 좋겠다.
주변에 선한 취미 삼아 여행을 다니는 분들이 많다. 물론 타국의 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음식을 음미하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필자는 최대한 현장감 넘치는 단어를 분별하여 넣고 오감으로 활발하게 느끼도록 글자에 생기를 넣으려 노력했다. 그 노력에 그치지 않았다. 영감까지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여행에 갈증을 느끼는 분들에게, 그리고 곧 회복될 우리의 일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모두 필요한 책이 되도록 이 책을 썼다.
---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약 2주간, 실제로는 10박 11일간 성지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 중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 있는 동안 짐을 싸고 푸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곳에 여행자, 곧 나그네로 온 것이고, 이곳이 내가 영원히 살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집은 서울에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본향은 천국이다. 영원히 살 그 본향에 이르기 전까지 그리스도인은 끝없이 여행을 한다. 이것이 천국 나그네의 삶이다. 사도 베드로가 전한 것처럼 우리는 분명 흩어진 나그네들이 맞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목적 분명한 정체성 또한 가진다. 우리는 나그네들이지만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져 있으며,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니라 저 천성 예루살렘이다. 그곳이 우리가 가야 할 참 본향이요 우리 집이다. 갑바도기아에 있던 믿음의 공동체는 이런 정체성 위에 견고히 서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시험과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였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 p.49-50
몸을 구푸려 좁은 통로를 더 내려갔다. 밖은 덥고 통로는 좁아도 암석으로 된 동굴이라 시원하다. 30분 정도 내려가니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독특한 공간이다. 가운데에 큰 통로가 있고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다. 누가 봐도 그곳은 십자가 형태의 예배당이다. 데린쿠유의 가장 깊은 곳에 예배당이 있는 것이다. 이 예배당으로 오려면 좁은 통로를 한참 지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평소 예배당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타고 넓은 도로를 달리거나 탁 트인 길을 걸어간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주차장이 잘 구비된 교회를 선호한다. 교회를 정할 때 집 근처면 좋고 멀어도 가급적 교통이 편한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편하게 교회에 가서는, 자리에 앉아서 조는 둥 마는 둥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듣고 헌금하고 축도를 받으면 그것으로 예배 잘 드린 것이라고 만족한다. 그렇게 또 한 주간을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사실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죽어야 살고 부활한다.
--- p.74
돌밖에 없는 옛 도시에 우리는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일까? 순례여행을 가기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형을 만났다. 그 형에게 터키 그리스 순례여행을 간다고 자랑했다. 형은 “야! 다 무너진 교회 터랑 돌들밖에 없을 텐데, 거기 뭐 볼 게 있다고 가냐?” 하고 타박했다.
“형, 그거 보러 가는 거죠. 다 무너진 교회 터를 보러 가는 거예요. 가서 중요한 건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오려는 것이죠.”
맞다. 우리는 다 무너진 옛 교회 터를 보고 허무함만 느끼다 오려고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셨을까?’를 깨닫고 오기 위해 이곳에 왔다. 결국 하나님은 이 땅에 돌만 남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셨다.
--- p.81
장소는 중요한 결단을 기억나게 만들기도 한다. 내 삶을 돌아보아도, 나에게도 결단의 장소들이 있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장소, 복음을 위해 살 것을 결단하고 신학교로 향했던 장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장소 말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교회 터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결단의 장소에 서 있다니 말이다.
우리 역시 신앙의 순례 속에서 믿음의 길을 걷다보면 반드시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어떤 결단을 해야 할까? 사도 바울과 같이 티끌을 떨어버리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 복음과 하나님나라라는 사명을 위한 결단도 해야 한다.
결단은 신앙을 살아있게 한다. 실존적인 해석 같지만,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는 결단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신앙은 결단을 통해 절대자에게 나아가고 결단을 통해 성장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나는 다시 결단했다. 생명력 있게 살아가자고!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 p.92-93
개양귀비 꽃은 성경에 나오는 ‘들에 핀 백합화’로 알려져 있다. 그 백합화가 흰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다는 사실도 혼란스러웠지만, 백합화에서 백자의 한문이 흰 백(白)이 아니라 일백 백(百)자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의 가사 후렴구에서 ‘주는 저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이라고 할 때, 그 백합이 고결과 순결의 상징인 하얀 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백합화가 아닌 것이다. 조화로 쓰이는 향기 강한 흰 꽃이 아니라, 중동 들판 어디나 쫙 깔려 있는, 흔하디흔한 빨간색 들풀이 성경의 백합화였던 것이다. 광야 아무 데나 피어 소중한 줄 모르는 꽃, 말하자면 잡꽃, 그런 백합이 상징하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 p.98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유명한 말씀이다. ‘차든지 뜨겁든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하다. 우리가 가장 자주 들은 해석은 ‘열정의 차이’다. 차가운 것은 냉랭해진 열정을 말하고 뜨거운 것은 말 그대로 뜨거운 신앙을 말한다. 그래서 과거의 성경 해석자들은 “차갑거나 미지근하지 말고 뜨거워라. 신앙에서도 뜨거워야 한다”라고 적용해주었다. 그런데 최근의 해석은 지명과 그 지역적 특성을 통하여 영적 적용을 도출한다. 골로새 지역의 차가운 물은 목마른 이들에게 생수가 된다. 살아나고 회복된다. 히에라볼리에서 발원한 온천은 따뜻해서 치유하는 물이 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로 흐르는 온천수는 흐르는 만큼 미지근해져 목욕은커녕 먹으면 질병을 유도하고 구토 증세를 동반한다. 그래서 성경해석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을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미지근한 신앙 태도를 버리고 생수처럼 차갑든지 온천처럼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권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열정이 문제가 아니라 미지근한 그들의 삶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 p.127
에베소는 세계문화 유산 중 7대 불가사의에 꼽히는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에베소는 지리학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나 중요한 도시이다. 로마 제국 시대부터 행정과 교통으로 중심지에 속한다. 유적들의 규모만 보아도 에베소라는 도시가 얼마나 중요한 도시였는지 짐작 가능하다. 이 지역의 아데미 신전이 유명했던 이유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가 35세에 왕위에 오른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 에베소였다. 그곳을 아데미 여신에게 봉헌한다. 그후 에베소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에게, 그리고 BC 355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한다. 에베소는 에게해의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점차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수차례 지배자가 바뀌면서도 이 도시는 아데미 신전을 고수하였고, 이것을 내세워 돈벌이에 성공한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시기에 이곳을 방문하였다. 아데미 신전은 사도 바울 시대에 이미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의 주요 생존 수단과 연결되었다. 특히 은세공업자들은 아데미 여신상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벌었다.
--- p.184-185
아마도 바울은 아레오파고스에서 보이는 저 높은 신들의 도시를 향해 손가락을 들고 강한 확신으로 강론했을 것이다. 아테네를 평안과 행복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지은 파르테논 신전과 니케 신전들을 가리키며 그는 자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저곳,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저 신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론을 펼쳤던 비마터에 서 보았다. 아크로폴리스가 상당히 웅장하게, 마치 병풍처럼 서 있다.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선포하는 바울에게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은 매우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신전을 향해 손가락을 펼쳐, 저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할 때 사람들의 눈빛은 어땠을까?
--- p.249
사도 바울도 에베소 같은 항구도시나 테살로니키처럼 해안을 따라 형성된 도시들을 방문하였다. 분명 도보(道步)로 이동했을 것이다. 내가 차로 달리는 이 길은 2시간이면 순식간에 갈 수 있지만, 바울은 몇 날 며칠이고 걸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복음의 정수는 바울 같이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으로 허락된 것이다. 산맥이 나오면 그 산을 넘어야 했다. 그러니 때때로 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