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어찌하여 500에 55를 낼 수 있게 되든, 아니면 500에 45짜리 다른 방을 찾든, 어느 쪽이든 삶이 그다지 즐거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것이 문제였다. ‘즐겁지 않다.’ 즐겁지 않은 이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억울해졌고, 결국 방을 빼기로 했다. 대신 돌려받은 보증금으로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에 인위적인 사건을 만들자. 결심만으로도 마음이 담대해졌다.
--- p.15
태풍이 지난 뒤 숲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간만에 별 사진을 찍고 싶었다. 카메라 뷰파인더 안에 점점이 박힌 별들을 선으로 이어 별자리를 가늠해보았다. 그럴 때면 문득 별들을 잇듯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질문들이 이어졌다. 캠프장에서 현서의 말을 계속 들어주었더라면, 우리 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착각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면, 옆 반 선생님에게서 따돌림 당하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리 없다고 웃어넘기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별자리를 설명해주듯 그 아이에게 세상을 버티는 법을 말해주었더라면……. 그랬다면 현서는 자신이 찍은 별자리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덧없는 질문들을 반복했다. 밤하늘을 찍기 위해 필름 한 롤을 다 써버리고도 답을 찾지 못했다. 이 필름의 서른일곱 번째 사진이 제대로 현상된다면, 현서가 잠들어 있는 곳에 두고 오리라.
--- p.81~82
“포기해. 분위기를 봐.” 오늘도 배는 뜨지 않았다.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매표소 직원 말대로 항구 분위기는 어제보다 더 어수선했다. 노숙하는 난민의 수가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들은 몰래 내다버린, 바닷물에 섞이지 않는 기름이 이룬 띠처럼 항구 여기저기에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바위 같은 얼굴을 한 난민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바다 곁에 있는데도 사막 한중간에 있는 듯 텁텁한 기분이었다. 습기 하나 없는 건조한 모래바람이 맹렬히 휘몰아쳤다. 회오리에 휩쓸릴까 싶어 얼른 돌아섰다. 그때 칭얼거리다가 엄마 품에 지쳐 잠든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침과 눈물이 엄마의 가슴팍에 동그랗고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 p.100
외로워졌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파리에 와서 나는 왜 이토록 외로워하고 있는 걸까. 돋보기가 달빛을 모아 종이라도 태우는 양, 내 속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 폴폴폴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불이 붙기 전에 벤치에서 일어났다. 한번 붙은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후회와 미련으로, 자책으로, 열등감으로 숲을 태우듯 번져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원에서 나와 콩코드 광장을 향해 다시 걷고 또 걸었다. 밤인데도 관광객들로 붐볐던 샹젤리제 거리와 달리 그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때였다. 횡단보도 너머로 단발머리에 베레모를 쓴 동양 여자가 보였다. 한쪽 어깨에는 화구통을, 다른 쪽 어깨에는 스케치북이 든 천 가방을 메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어머니의 옛 모습처럼 양 볼이 붉은 그녀는 호호 불어 손을 녹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녀의 품에 그 책이 안겨 있었다. 매번 내 뒤를 쫓는 보라색 책. 놀라 책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순간 숨이 목구멍에 탁 채었다. 그녀는 생기 있던 시절의 나였다.
--- p.146~147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좀 더 밝고 긍정적이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아프고부터는 움츠러들었어. 아니, 아니, 지금은 괜찮아. 그래도 크게 한번 아프고 난 뒤에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마다 두렵고 무서워진 게 사실이야. 삶이니 죽음이니, 그런 내 의지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휘둘리고 난 후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나, 신의 섭리나 우주의 순환 앞에서 내 의지나 노력은 그저 파리의 날갯짓 정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마냥 허무해지지.
맞아. 여기 와서 파도를 타겠다고 결심한 것도 두렵고 허무한 마음을 이기기 위해서였어. 도전이란 말 멋지잖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후 새로운 일에 도전해서 결국 병마를 극복한다! 얼마나 멋져. 물론 다들 힘들 거라고 했던 큰 수술을 받고 살아남은 뒤로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선물 같았지. 온몸이 비타민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의욕이 넘쳤으니까. 남은 생은 덤으로 받은 보너스라는 생각에 감사했고, 내 두 발로 그토록 오고 싶었던 포르투갈에 왔다는 사실에 순간순간이 기적 같았지.
--- p.174
강가가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붉었다가 노랬다가 팥죽색이었다가 하는 노을을 보고 있으니, 이제 정말 여행 막바지구나 싶었다. 개도 그걸 아는지 아니면 강바람이 선선하게 콧잔등을 간질여서인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노을을 바라보았다. 좋다. 좋구나. 여행은 좋은 거구나. 이 순간에 이런 걸 보려고 여행을 오는 거구나.
--- p.219~220
이환은 사람들이 그 위험천만한 상황에 왜 돈과 시간을 들여 스스로를 놓이게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도를 겪고 비행기를 놓치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기꾼을 만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거부감만큼이나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살아온 인생을 뒤엎을 만한 계기를 얻기도 하고, 잊었던 설렘과 흥분을 느끼기도, 순수한 환희를 체험하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마주한 날이면 이환에게도 그 감정이 전염되어 커피를 서너 잔 연달아 마신 듯 심장이 뛰어 밤새 뒤척거렸다. 책을 읽다 만족스러운 결말을 보고 눈시울이 핑 도는 것처럼, 오랫동안 깨지 못한 게임을 시원하게 클리어한 것처럼 쾌감을 느끼는 날도 있었다.
--- p.24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