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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뮈스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 양장 ]
리뷰 총점8.9 리뷰 14건 | 판매지수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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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8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625g | 128*188*30mm
ISBN13 9788994054421
ISBN10 899405442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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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란트에서도 가장 분지인 로테르담과 호우다는 물이 많은 지역이며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12마일이다. 이들은 조그마한 도시로서 규모로 따진다면 도르트레히트, 하를렘, 레이던, 급속히 부상하는 암스테르담의 다음 순서였다. 두 도시는 문화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에라스뮈스는 1466년(추정) 10월 27일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그의 가계와 친척들에게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사생아 탄생 사실을 나중에 알았던 것 같다. 출생의 오점에 대해서 아주 예민했기 때문에 그 비밀을 공개하기보다는 감추려고 더 애를 썼다. --- p.31

주교 밑에서 근무하는 것은 결국 실망스러운 일로 판명되었다. 에라스뮈스는 베르겐, 브뤼셀, 메흘린 등지로 관저를 빈번히 옮겨 다니는 주교를 수행했다. 주교는 아주 바빴으나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의 소망인 로마 여행은 성사되지 않았다. 주교는 처음 몇 달 동안에는 에라스뮈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여 주었으나, 그 후에는 기대한 것만큼의 배려가 없었다. 그리하여 에라스뮈스는 다시 우울한 심리상태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예전 활기를 모두 빼앗아 버린 운명을 가리켜 “아주 가혹한 운명”이라고 말했다. 공부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는 친구 빌렘을 부러워했다. 그는 스테인의 작은 암자에서 ‘행운의 별빛’ 아래에서 아름다운 시를 쓰면서 보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에라스뮈스는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쉴 일 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 무감각해지고, 또 가슴도 식어 버려서 예전의 공부는 더 이상 그를 매혹시키지 못했다. --- p.55

에라스뮈스가 파리 행을 결심한 주된 목적은 신학박사 학위를 따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에라스뮈스로서는 그리 어려운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수사修士로서 수도원에서의 학력이 인정되어 문과대학에서의 사전 학습은 면제되었고, 게다가 그의 학식, 놀라운 지능, 부지런함 덕분에 단시일 내에 시험과 논문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중간에 다른 곳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1499년까지의 파리 체류는 고통과 분노의 시기였다. 학자 생활에 필수적으로 따라다니는 가난과 그 가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끄러운 생계 수단(가정교사 혹은 잡문 쓰기)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고통의 시기였다. 그렇지만 앞날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빛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려움을 겪게 된 첫 번째 원인은 신체적인 것이었다. 그는 몽테귀 대학에서의 가혹한 생활환경을 이겨내지 못했다. 썩은 계란과 지저분한 침대는 평생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곳의 가혹한 환경 때문에 말년에 허약한 체질로 고생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대화집』에서 그는 스탄동크의 금욕, 고행, 단련하는 제도를 혐오스럽게 여기는 논평을 했다. 그는 이곳에 1496년 봄까지 머물렀다. --- p.62

에라스뮈스에게 혐오증을 안겨준 것은 그 시스템의 건조하고 쓸모없는 방법론만이 아니었다. 에라스뮈스의 사상과도 관련이 있었다. 에라스뮈스의 마음은 넓고 날카로웠지만 철학적이거나 교리적 추론을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콜라주의만 싫어한 게 아니었다. 에타펠의 르페브르가 가르치는 젊어진 플라톤 사상과 재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고리타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파리 시절, 에라스뮈스는 성경적, 도덕적 바탕을 깔고서 라틴 문학을 선호하는 휴머니스트였고, 오래 전부터 좋아해 온 히에로니무스 연구에 몰두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에라스뮈스는 자신을 시인 겸 연설가라고 소개했는데, 연설가는 곧 문필가라는 뜻이었다. --- p.66

로베르 가갱과 파우스투스 안드렐리누스 같은 사람들과의 교우는 명예로운 것이기는 했지만 수익을 올려 주지는 못했다. 캉브레 주교의 보조금은 그가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1496년 봄 에라스뮈스는 병에 걸려 파리를 떠났다. 먼저 베르겐으로 간 그는 후원자인 주교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어 건강을 회복하고서 친구들이 있는 홀란트로 갔다. 거기서 계속 머물 생각이라고 그는 당시에 말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파리로 되돌아갈 것을 권했고, 그는 1496년 가을에 다시 파리로 갔다. 그는 빌렘 헤르만스가 쓴 시들과 자기소개 편지를 가갱에게 보였다. 곧 그 시들을 출판해 줄 인쇄소가 섭외되었고, 에라스뮈스는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헤르만스를 파우스투스 안드렐리누스에게도 소개시켰다. --- p.69

에라스뮈스는 영국에 처음 건너가서 1499년 초여름부터 1500년 초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영국 체류는 그가 내면적으로 더욱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박식한 시인, 지체 높은 귀족의 피보호자 자격으로 영국에 건너갔고, 문학적 재능을 알아주고 평가하는 더 넓은 세계와 더욱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영국을 떠날 무렵에는 장래에 여건이 형성된다면 좀 더 진지한 사업에 자신의 재능을 활용할 수 있기를 열렬히 바랐다. 이런 심적 변화는 영국에서 두 명의 새로운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두 친구는 지금까지 알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인품을 갖추고 있었는데 바로 존 콜렛John Colet과 토머스 모어Thomas More였다. --- p.75

에라스뮈스는 의심이 많았고, 짜증을 잘 냈으며, 툭하면 흥분을 하고, 또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 무례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제 빌렘 헤르만스를 더 이상 참아 줄 수가 없었다. 너무 쾌락주의적이고 정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에라스뮈스는 자신은 쾌락이나 무기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충실한 친구 바트에게 대하는 태도는 정말 실망스러운 것이다. 물론 에라스뮈스는 그를 칭찬하고, 또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서도 바트가 에라스뮈스의 뻔뻔한 요구에 즉시 응해 오지 않으면 정말 기분 나쁘다며 불평을 터트린다. 자신(에라스뮈스)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베레 부인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지 바트에게 일러주는 에라스뮈스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가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충직한 친구(바트)가 1502년 전반기에 병으로 사망했을 때, 에라스뮈스는 슬픔을 표현하는 데 아주 인색했다. --- p.94

에라스뮈스의 문학 저서와 교육 관련 저서는 파리 시절에 구상된 것이었지만 그 중 대부분이 훨씬 뒤에 출간되었다. 이 저서들은 당시의 표현 방식과 논증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에라스뮈스 혼자 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님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당시 다른 학자들도 이와 유사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격언집』과 『대화집Colloquia』이 판을 계속하여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에라스뮈스가 다른 학자들보다 이런 교육의 분야에서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많은 휴머니스트들이 있었지만, 온 세상의 가정에 잘 알려진 이름으로는 “에라스뮈스”가 유일했다. --- p.98

스콜라주의의 세계에서, 에라스뮈스만이 그 사상 체계와 그 표현 방식의 세부 사항들을 완전 터득한 권위자로 인정되었다. 게다가 성경 지식, 논리학, 철학 등에 박식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스콜라주의의 전문 용어와 자연스러운 대중적 문어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페트라르카 이후 휴머니즘은 엄격한 삼단논법 구조를 불식하고 그 자리에 고대의 자유스럽고 암시적인 표현을 대체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학자들의 언어는 일상생활의 자유스러운 표현 방법에 접근해 갔고, 단테가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집필하는 등, 대중 언어를 고유의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 p.99

에라스뮈스의 어려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생계는 불안정했고, 일정한 거주지도 없었다. 생계 수단이 불안정한데도 불구하고 생계보다는 자신의 건강에 더 신경 썼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또 학문 연구에도 당장의 이익에 소용되는 것보다는 지식의 근원에 도달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품었다. 그는 계속하여 전염병의 공포에 시달렸다. 1500년에는 전염병을 피하여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처음에는 오귀스틴 뱅상 카미나드의 집에 하숙했다. 하지만 하숙인들 중 한 사람이 병에 걸리자,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어린 시절 데벤터에서 겪었던 것 때문에 그는 지나칠 정도로 전염병을 두려워했다. --- p.112

에라스뮈스는 그리스어 공부에 열광하고 탐닉했기 때문에 그 혜택을 절친한 친구들에게도 널리 알리려고 애를 썼다. 그는 바트에게 그리스어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트는 시간이 없었고, 라틴어가 더 적성에 맞았다. 에라스뮈스는 하를렘을 방문하여 친구 빌렘 헤르만스를 만났을 때 그 또한 그리스어 학자로 만들려고 애썼다. 그럴 목적으로 그리스어 책들을 가방 가득 담아 가지고 갔으나 헛수고를 했을 뿐이었다. 빌렘은 그리스어 공부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에라스뮈스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돈과 정력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친한 친구를 잃었다고까지 생각했다. --- p.116

『엔키리디온』의 주제는 에라스뮈스 평생 작업의 주제가 될 터였다. 이 세상에서 실체와 그림자가 너무도 다른 것은 역겨운 일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존경하지 말아야 할 것을 존경한다. 미혹, 기계적 절차, 무신경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의 진정한 실체 혹은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는 이 주제를 나중에 『우신 예찬』과 『대화집』에서 또다시 거론한다. 에라스뮈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종교적 감정 이외에 사회적 감정도 있었다. 「기독교인이 가지면 좋은 생각들」이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그는 계급의 오만함, 민족적 적개심, 직업적 시기심, 종단 간의 경쟁 등을 개탄하면서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서로 떼어놓는다고 말한다. --- p.122

1502년 늦여름, 그는 루뱅으로 갔는데, “전염병 때문에 그곳으로 쫓겨났다”라고 적었다. 파리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할 목적으로 1425년에 세워진 루뱅 대학은 16세기 초에 신학적 전통을 단단하게 지키는 학문적 요새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가 이 대학에서 고전 연구를 활발히 펼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런 고전 숭상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사제장이자 신학 교수였던 위트레흐트의 아드리안(후일의 교황 아드리아누스 6세)은 에라스뮈스를 위해 그곳에 교수 자리를 얻어 줄 생각을 했다. 에라스뮈스는 “여러 이유 때문에 교수 제안을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내세운 이유들 중 한 가지는 우리에게 그리 명석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네덜란드 언어에 너무 가깝게 있다. 그 언어는 남들을 해치기만 할 뿐 이롭게 하지는 못한다.” 그 외의 이유는 자유로운 생활을 사랑하는 정신과 학문 연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시간만 나면 학문을 연구하고 싶어 했지, 가르치는 일에는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 p.127

에라스뮈스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늙었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었다.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노년의 문턱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다. 정말 노년은 빨리도 오는구나! 그는 자신의 인생행로를 되돌아보았다. 견과류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던 소년 시절, 시와 스콜라주의와 그림에 몰두하던 청년 시절. 자신의 엄청난 학식, 그리스어 실력, 학자적 명성에 대한 야망 등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노년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우리는 또다시 세상에 대한 체념과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를 듣게 된다. 농담과 한사閑事는 사라져라. 철학과 시가詩歌도 물러가라.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흠모하는 순수한 마음만 생각하겠노라.” --- p.136

에라스뮈스는 1506년 9월 4일, 토리노에 도착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 학위 자체는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신학적 저술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공식 증표로 여겼고, 나중에 비판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그의 입장을 옹호해 줄 것으로 보았다. 그는 편지에서 박사 학위를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초창기 파리 유학 시절에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애쓰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네덜란드 친구들에게조차도 그 학위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1501년 초 베레의 안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이탈리아에 가서 박사 학위나 따볼까요? 이탈리아 여행도 박사 학위도 다 어리석은 계획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시대의 관습에 순응해야 합니다.” --- p.138

에라스뮈스는 인쇄술이라는 초창기 산업과 함께 성장한 세대였다.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인쇄기는 최근에 획득된 기계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이 신성한 기계”를 소유하게 되어 풍요로움과 강력함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꼈다. 에라스뮈스와 그의 저작의 명성은 인쇄술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인쇄술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증명했지만, 동시에 어느 의미에서는 그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의 사상이 너무 잘 알려져 후일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기가 없었다면 에라스뮈스가 어떻게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겠는가? 고대 문헌들을 정화하고 회복시켜서 널리 유포시키는 것은 그의 평생 열정이었다. 인쇄된 책은 동일한 텍스트를 수천 명의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해 주었다. 그것은 이전 세대들은 맛보지 못한 커다란 혜택이었다. --- p.146

에라스뮈스와 단행본 인쇄를 이어 주는 연결고리는 라틴어였다. 탁월한 라틴어 실력이 없었더라면 그가 누린 저술가의 지위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쇄술은 라틴어가 널리 사용되도록 촉진시켰다. 그 당시 출판업자에게 성공과 대규모 매출을 약속해 주고, 에라스뮈스의 명성을 확립시켜 준 것은 라틴어 출판물이었다. 라틴어 책자는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팔려 나갔기 때문이다. 유수한 출판업자들은 그들 자신이 휴머니즘에 열광하는 학자들이었다. 교양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인쇄소의 교정 요원으로 활동했다. 가령 에라스뮈스와 모어의 친구로서 안트베르펜 시의 서기였던 페터 길레스Peter Gilles는 디르크 마에르텐스를 위해 전지 교정을 했다. --- p.148

어리석음은 즐거움이요 경쾌함이며 인생의 행복에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이다. 열정이 없이 이성만 있는 사람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그는 인간적 감정이 없는 퉁명스러운 자요, 허깨비나 귀신이며, 모든 사물이 그로부터 피해서 달아나는 두억시니이다. 그러니 그가 사랑이나 동정을 느낄 리가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모든 것의 무게를 정확하게 달며, 그 어떤 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또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만족하며 남에게 맡기면 안심이 안 되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그 혼자 건강하며 그 혼자 왕이고 그 혼자 자유롭다. 에라스뮈스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교조적이고 징그러운 인물이다. ‘어떤 국가가 이처럼 완벽하게 현명한 사람을 그 나라의 통치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에라스뮈스는 질문을 던진다. --- p.161

1509년의 초여름 에라스뮈스는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토머스 모어의 집에 칩거하며 『우신 예찬』을 썼다. 그리고 그로부터 근 2년이 지난 1511년 봄에 출판업자 질 구르몽Gilles Gourmont을 만나 책 출판을 논의하기 위해 파리 출장을 간다. 이 2년 동안 에라스뮈스의 행적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이 시기에 주고받은 편지들은 단 한 통도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후견자 격인 마운트조이의 집에서 보내거나, 아니면 토머스 모어의 집에서 살면서 재치 넘치고 고상한 인사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그것은 평소 에라스뮈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해 왔던 생활이었다. 모어의 집에는 에라스뮈스가 전에 영국에 머물면서 사귀었고, 또 마음에 딱 맞는 친구인 앤드루 암모니우스도 자주 놀러 왔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평소 매력을 느꼈던 학문을 방해받지 않고 연구할 수 있었고, 또 가까운 장래에 대한 근심걱정도 별로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과도한 명성 탓에 심적 부담감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명성은 나중에 그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고난과 상실감을 안겨주게 된다. --- p.177

평소 늘 그러했듯이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영국을 떠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는 예전의 약속 사항을 받아내기 위해 로마로 간다는 말을 흘렸다. 하지만 내심 네덜란드로 가서 행운을 찾아볼 결심을 했다. 홀란트로는 갈 생각이 없었고, 브란트의 궁정에 무슨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의 일차적 목표는 바젤의 프로벤 인쇄소를 방문하여 신간과 구간 등 많은 저서들의 출간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가 휴대한 원고에는 평생의 작업이라고 여길 뿐만 아니라 순수 신학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신약성경과 히에로니무스 편집 원고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해협을 건너는 순간 원고가 든 손가방이 다른 배에 선적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크게 당황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정성을 기울인 원고를 잃어버렸다며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과 똑같았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그 원고를 프랑스에 도착하여 곧 되찾게 되어 크게 기뻐했다. --- p.192

에라스뮈스의 라틴어역 신약성경은 대담한 신학적 시도였는데, 이 두 중요한 저작이 나오자 에라스뮈스는 신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고전 문학의 태두요 기준인 동시에 이제 신학 연구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권위는 모든 나라에서 높아졌고 그의 편지들은 점점 분량이 늘어났다. --- p.199

동시대의 사람들은 에라스뮈스에게서 그들의 구원을 기대했고, 또 구원의 말을 듣기 위해 그의 입술에 꼭 매달렸다. 무엇이 에라스뮈스를 그처럼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상의 자유, 새로운 스타일의 명확함, 지식의 순수함과 단순명료함, 건강하고 올바른 생활을 지향하는 새로운 조화 등을 실천하는 인물로 보였다. 그는 새롭게 발견된 미지未知의 부富를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로지 그만이 그런 부를 나누어 줄 수 있었다. --- p.214

에라스뮈스의 교회관은 더 이상 순수 가톨릭(보편교회)이 아니었다. 중세 기독교 문명은 신비주의의 바탕, 철저한 위계 구조, 신-인간-동물-사물 사이의 적절한 균형 등을 갖춘 아주 영광스러운 구조물이었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이런 구조물의 외양을 장식하는 세부 사항과 장식물들만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져와 세운 스콜라 철학의 구조와 그 구조 위에 단테가 세워 올린 천국-연옥-지옥의 정신적 구조가 분명 있었지만, 에라스뮈스는 그것들을 도외시하고 자신만의 다른 세계를 보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순수한 매혹과 고상한 감정이 깃든 세계였고, 그는 이것을 동시대 사람들 앞에 높이 들어 올렸다. --- p.218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경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원적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장의 물품 가격을 잘 알고, 영국 왕의 원정 계획에 대해서 소상하고, 로마에서 온 소식을 잘 알며, 덴마크의 생활 환경을 꿰뚫고 있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대화집』에 나오는 현명한 노인은 그리 높지 않은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고 안전함을 가져다주는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 대하여 미소를 짓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채 늘 한정하게 있으면서 자족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평온과 조화의 이상 주변에는 미학적 가치를 가진 기화요초들이 피어난다. 에라스뮈스가 중시하는 예의바름, 손님들에 대한 아낌없는 환대, 자상하면서도 공손한 접대, 교양 높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매너 등이 그런 꽃들이다. 그 가까운 곳에는 에라스뮈스의 정신적 특성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난폭함과 과도함을 싫어한다. 따라서 그리스 드라마의 코러스는 그를 불쾌하게 만든다. --- p.225

에라스뮈스의 사상은 철학적인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저서들은 칼같이 정확한 논리적 구분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다양하고 복잡한 구체적 사항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엮어내는 역사적 관점에 입각하여 이 세상의 운영 방식을 심오하게 꿰뚫어보지도 않았다. 그의 사상은 문헌적(언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만 있었더라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깊은 윤리의식과 강렬한 미학적 경향을 갖고 있었는데, 이 셋(언어, 윤리, 미학)이 에라스뮈스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에라스뮈스 사상의 바탕은 자유, 명석함, 순수함, 단순명료함, 한정함에 대한 열망이다. 이것은 오래된 이상적 인생관이지만 그는 풍요로운 정신을 발휘하여 그 인생관에 새로운 실체를 부여했다. 자유가 없으면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한가함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그가 어느 편에도 소속되지 않은 것은 완벽한 독립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 p.228

에라스뮈스의 사상은 동시대인들의 가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이끌어냈고, 또 문명의 진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를 역사상의 영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가 더 높은 정신적 고지에 오를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그의 성품이 그의 사상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 탓이 아닐까? 비록 에라스뮈스는 자신을 가리켜 아주 단순명료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성품은 복잡다단한 것이었다. 그 성품은 에라스뮈스 사상의 구조를 결정한 여러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그의 성품이 결국 그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발견한다. --- p.247

에라스뮈스의 겸손과 자신에게 찾아온 명성에 대한 경멸은 다소 수사학적(과장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에라스뮈스 자신의 개인적 특성이라기보다 모든 휴머니스트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특징이다. 또 이런 분위기는 노골적으로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던 저서들은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그 책들이 오랜 수명을 누릴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가 쓴 편지들도 시원치 않게 보았다. 친구들이 자꾸 출판하라고 권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출판한 것이다. 그가 시를 쓴 것은 새로운 글쓰기를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곧 천재들이 등장하여 그를 무색하게 만들고, 그를 말더듬이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를 희망했다. 명성이란 무엇인가? 세속에 전해지는 것뿐이다. 그는 명성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누렸고, 어느 때라도 그것을 던져 버릴 용의가 있었다. --- p.256

1519년 3월 28일, 루터가 처음으로 직접 에라스뮈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의 보석이며 우리의 희망인 에라스뮈스여, 당신도 내 얘기를 많이 듣고 나도 당신 얘기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서로 만나지 못했군요.” 그는 에라스뮈스가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건 하느님이 그를 축복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루터)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더 오랜 침묵이 지속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온화한 신사인 나의 에라스뮈스여, 당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 작은 형제의 존재를 인정해 주소서. 나는 당신을 정말로 존경하고 당신이 나의 친구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외에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무식하여 세상 한 구석에 무명의 상태로 엎드려 있다가 사라져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p.292

에라스뮈스가 조정자 역할을 포기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다음의 사실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1520년 여름, 헨리 8세, 프랑수아 1세, 카를 5세가 칼레에서 만나 회담을 했다. 에라스뮈스는 카를 5세의 고문관 자격으로 그 회담에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만약 화해에 대한 그의 생각이 불변이라면 여기에 좋은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독일 제국, 그리고 이탈리아의 상당한 지역을 대변하는 군주들 사이의 평화로운 회의에서 뭔가 구체적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노력을 했다는 흔적은 없다. 에라스뮈스는 1520년 7월 칼레에 있었고, 그곳에서 헨리 8세와 대화를 나누고, 또 토머스 모어와 인사를 했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으로 영국 친구들에게 인사를 한 것 말고는 그 여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 p.299

에라스뮈스는 타고난 온건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비정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실제적 현실의 바깥에서 너무 오래 살았고, 또 인간의 교정 가능성에 대해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적 행위와 통치의 어려움과 필요성을 잘 깨닫지 못했다. 훌륭한 통치에 대한 그의 사상은 너무나 순진했고, 강력한 윤리적 기반을 가진 학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그 바탕이 아주 혁명적이었다. 그런 사상에 맞추어 현실적 조치를 추론해 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모어, 부다에우스, 자시우스 같은 정치적·법률적 사상가들과 교우했으나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정부 형태, 법률 혹은 권리에 대한 구체적 질문이 그에게는 아예 없었다. 그는 경제적 문제들도 전원적 단순함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군주는 좋은 의도로 다스려야 하고 세금은 가능한 한 부과하지 말아야 했다. “훌륭한 군주는 일반 시민들이 좋아하는 특성을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쫓아 버려야 한다. 그는 군주의 평화적 사업들을 말할 때 오히려 통치의 문제에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한다. 가령 도시의 청소, 다리·관청·거리의 건설, 물웅덩이의 배수, 강바닥의 준설, 황무지의 제방과 개간 사업 등이 그런 사례이다. 이런 평화적 사업을 말하는 에라스뮈스는 동시에 청소와 정화를 자신의 주된 성격으로 갖고 있는 네덜란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 p.314

마침내 에라스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때 에라스뮈스가 생각했던 멋진 계획을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권의 대동단결과 신앙의 일치를 호소하면서 격렬한 성품의 루터에게 제동을 걸어 온 세상이 합리적인 정신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논쟁은 두 사람 사이의 논쟁으로 그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이라는 대변혁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그 논쟁은 하나의 뒤풀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에라스뮈스만이 환멸과 피곤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 또한 영웅적 전성기가 지나갔고, 여러 조건들에 의해 제약을 받아 세속사에 끼어들어 실망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p.332

에라스뮈스의 말년에 세상을 계속 뒤흔들던 중요한 문제들이 급격히 위협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타협이나 동맹이 가능해 보였던 분야에서조차도 첨예한 갈등, 선명한 파당주의, 엄격한 원칙 등이 평화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에라스뮈스가 바젤을 떠날 준비를 하던 1529년 봄, 가톨릭 세력이 과반을 차지한 스파이어 의회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양보를 했던 1526년의 “후퇴”를 취소시키고, 오로지 루터파에게만 기존의 양보 사항을 그대로 누리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변화나 새로운 사항들은 절대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츠빙글리파와 재세례파는 조금의 관용도 허가받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복음주의를 지지하는 군주들과 도시들은 일제히 항의(Protest)했고, 이것을 계기로 가톨릭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게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 p.368

에라스뮈스의 한평생을 되돌아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왜 그는 그토록 위대한 인물로 계속하여 추앙되는가? 겉보기에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저 엄청난 갈등(종교개혁)을 적절하게도 비극이라고 불렀지만, 그 비극에 경악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과감하고 열광적인 16세기는 절제와 관용을 중시하는 에라스뮈스의 이상을 비웃으며 우레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교양의 핵심인 라틴어 학문은 이제 한물 가버렸다. 그는 이제 하나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이 이토록 낭랑하고 청명하게 들려오는가? 왜 우리를 계속 응시하는가? 마치 그가 실제로 발언한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 p.384

에라스뮈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너무 신경 썼고, 하고 싶은 말을 잘 참지 못했다. 그는 생각이 워낙 많았고, 또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논증, 사건, 사례, 인용을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제시했다. 그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했다. 평생 동안 휴식하며 명상할 시간을 자신에게 부여하지 못했고, 그래서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상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주변 환경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만 용감하게 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휴식과 자유를 그는 무엇보다도 소망했다. 그처럼 불안정하고 의존적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이면서도 폭풍우 속으로 뛰어나가는 측면도 있다. 그의 의지력은 아주 강했다. 그는 엄청난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눈앞의 위대한 이상을 좇아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결코 자족하지 못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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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높이 평가하면서, 특히 종교개혁을 더 좋은 세상의 새로운 출발로 여겼기 때문에, 중세 후기도 나름대로 아름다운 문명을 갖추었다는 『중세의 가을』의 주제는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는 다르게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갔던 영국과 미국은, 합리성의 기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그 책의 예리한 지적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중세의 가을』은 역사서로서, 또 문학 작품으로서 앞으로 오랫동안 고전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이 위대한 저서의 속편이다. 이 책은 1924년에 출판되었고, 저자의 필력이 가장 왕성하던 시대에 나온 저서들 중 하나이다. 그 주제는 『중세의 가을』에서 다루어진 시대보다 30년 후의 시대를 살았던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다. 『에라스뮈스』의 여러 갈피에서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에라스뮈스는 하위징아가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에라스뮈스에 대하여 쓴 말들은 그 자신에 대하여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에라스뮈스의 태도에서 세상의 변화에 반응하는 하위징아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G. N.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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