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엌으로 내려가 차를 탄다. 부엌 창으로 보이는 돌담이 정겹다. 집을 빙 둘러 현무암 돌담을 쌓았다. 세 면은 집 기초를 다질 때 나온 돌로 쌓고 길가에 면한 부엌쪽 담은 일부러 묵은 돌을 구입해 쌓았다. 부엌 돌담 위로는 검은 스테인을 칠한 콘크리트 벽이다. 덕분에 집 외관이 조금 특별해졌다. 돌담의 향토미와 검은 콘크리트의 도시미가 섞여 있다고나 할까.
차를 한 모금 문 채 부엌 돌담을 가만히 바라본다. 울퉁불퉁한 돌틈 사이로 하얀 빛이 비쳐든다. 삐죽빼죽 돌틈 사이로 아침 해가 부엌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밤에는 빛의 방향이 반대가 된다. 부엌의 등잔불이 돌담 틈새로 새어나가 담장에 내려와 붙은 별처럼 반짝인다. 호크니의 누님은 공간이 신이라고 했던가. 틈새야말로 예술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 「2018. 1. 29. 데이비드 호크니와 까만집
●… 불쑥, 두 사람의 성격이 궁금해진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뒤진다. 360도(?) 생각전환을 위해 우리 부부의 별자리 성격을 찾아볼 참이다. 나는 전갈자리다. 놀랄 일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머리가 끄덕여진다. 그럼 경현은? 그는 처녀자리니까….
처녀자리는 자신을 희생하는 완벽주의자로 나온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희생은 내 단어지 그의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아닌…가? 그야말로 힘들게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했…나?).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다. 신경질적이고 감정이 불안정하고….
그러고 보니 참 신통방통하다. 우리 부부 다툴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별자리 성격이 다 맞는 것 같다. 별 일 아닌 일에 짜증 한번 부렸다가 신중하고 독하게 따져대는 나를 어쩌지 못해 우물쭈물 말도 못하고 붉으락푸르락 쏘아보는 경현이고 또 나이고 보면…. 그렇다는 말은, 성격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별자리에 기대 너그러워지기로 마음먹는다. 부부싸움에 독침 같은 거 사용하지 말자고 다짐도 해본다. 칼로 물 베기여야 할 부부싸움에, 결정적일 리 없는 그런 일에, 그 무시무시한 걸 사용하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잖니, 정원아….
--- 「2018. 3. 9. 전갈자리」 중에서
●… 〈오페레타 이중섭〉 관람을 마치고 서귀포 예술의 전당을 나온다. 차에 타자마자 사모님이 말문을 연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느라 이야기가 산만해진 것 같아요. 한두 장면에 집중했으면 좋았을 텐데. 높은 소리 가수들은 가사 전달을 잘못하는 것 같고. 그건 그렇고 출연진 사진, 언제 찍은 걸 낸 걸까요? 다른 사람들인 줄 알았지 뭐예요.”
경현도 한마디 거든다.
“그러게요. 특히 두 주인공 모친들은 도무지…. 참! 구상 역의 바리톤, 소리 좋지 않던가요? 정말 잘하던데요.”
나도 끼어든다.
“저는 합창이 좋았어요. 서귀포에서 여인들이 부르는 합창은 저도 배워보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남덕, 전 아주 어렵게 한국에 왔다고 들었거든요. 중섭이 먼저 오고 남덕은 나중에 혼자. 배가 끊어져서 마지막 배로 겨우.”
“모든 걸 사실적으로 그리기는 어렵겠지요. 사실 이중섭, 제주도에 얼마 안 살았어요. 남덕과 헤어진 것도 부산에서라고 알아요.”
드디어 터진 선생님의 한 말씀! 왠지 한시름 놓인다. 만난 이후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살짝 걱정하던 참이었다.
--- 「2018. 9. 8. 창작 오페레타, 이중섭」 중에서
●… 제주살이 1년 만에 첫 도전한 올레는 공식거리 17.6㎞의 7코스, 서귀포∼월평 올레였다.
제일 먼저 닿은 곳은 작가의 산책길. 산책로를 따라 커다란 돌에 새겨진 시를 읽으며 걸었다. 특히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와 박목월의 「밤구름」은 너무 좋아 선 채 몇 번을 거듭 읽었다. 그 다음 걷고 걸어 닿은 곳은 경현이 좋아하는 동너분덕. 바위에 앉아 집에서 준비해간 콜라비도 먹고 65계단을 내려가 선녀탕도 구경하고 외돌개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다시 걸어 아름다운 돔베낭골을 지나 내 언젠가 이곳(캠핑카)에서 묵어보리라 결심케 한 서건도(썩은 섬)를 지나 법환포구와 강정마을을 지나 월평포구까지 걷고 걸었다. 중간 중간 점심도 사먹고 카페에서 커피도 사마시면서.
그런데 이상하다. 일기를 쓰는 지금, 내 머릿속에는 왜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아닌, 강정마을의 천막지붕이 가득한 걸까? 해군기지 반대 슬로건과 함께 있던, 색색의 굵은 털실로 짜 이어붙인 아름다운 천막지붕이?
왠지 모를 부끄러운 마음으로 구럼비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본다. 현장을 지나며 ‘어릴 적 놀던 구럼비가 그립다’는 현수막을 얼핏 본 것 같아서다. 결국 알아낸 것은, 구럼비는 까마귀쪽나무의 제주방언으로 ① 나무가 자생했던 길이 1.2㎞ 너비 150m의 거대한 한 덩어리 용암 너럭바위를 구럼비라 말한다는 것 ② 구럼비와 일대 해안이 용천수가 솟아나는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지대로 인정받아 2004년 절대보존지구로 지정된 바 있다는 것.
구럼비를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마음만큼은 조금 알겠다. 상대적 이유야 충분히 있었겠지만 그렇게나 굉장한 너럭바위가 추억과 함께 깨부숨을 당하지 않았던가.
--- 「2019. 2. 26. 제주올레 7코스 그리고 구럼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