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나는 심각할 만큼 심화해 가는 ‘교직주의’(clericalism)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재 교수는 그의 글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쇄신에 대한 제언”에서 한국교회의 교권화 현상을 풍자하고 나섰다. 개신교회 목사가 점차 ‘제사장화’ 되려는 것, 교회가 ‘성전’으로, 새벽기도회는 ‘새벽제단’으로, 헌금은 ‘제물’로,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 강단의 ‘성역화’ 그리고 직분의 ‘계층화’가 되어 가는 과정은 본래 성서적이고, 개신교적인 교회의 증언적 ? 봉사적 모습으로부터 점차 ‘기독교 왕국화’ 되어 가는 위기 현상을 풍자화한 것이다. 이것은 뷸만이 말하는 제2교회(the second church)의 영광과 몰락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
--- 「제1부 2장 _ 제3교회는 올 것인가?」 중에서
회당 공동체는 예루살렘 파괴 이후 성전을 대신하는 대체 형태로 나타났지만, 회당은 ‘성전 신화’를 비신화한 공동체로서 등단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한 옥좌로 신격화했던 과거 신앙은 이제 이방 속에서도, 전 우주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고, 말씀을 경청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서 회당은 성막처럼 ‘잠정적’ 공동체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회당은 성막의 ‘순례적’ 공동체는 아니었다. 성막이 하나님의 계시와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간 종말론적 공동체였다면, 회당은 하나님의 게명이 기록된 율법과 전통(안식일과 할례)을 배우고 또 설교를 듣는 말씀과 율법 공동체로서 변모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 보존을 위해(이방의 위협 속에) 필연적으로 발전된 형태이기도 하다.
--- 「제2부 3장 _ 구약에 나타난 신앙 공동체」 중에서
고구엘(Maurice Goguel), 슈나켄베르크(Rudolph Schnackenburg) 그리고 콘첼만(Hans Conzel- mann)은 처음 교회의 태동을 12제자의 공동체와 그 연속성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고구엘은 처음 교회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였으나,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 자신이 곧 교회’라는 의식에 있었다고 본다. 부활과 재림은 예루살렘 교회를 태동시킨 사건이었으나, 역사적으로 남은 것은 예수와 함께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였던 제자들의 ‘연속’(continuation)이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핵’(nuclear)은 12제자들의 사도성에 있었다는 해석이다.
--- 「제2부 5장 _ 처음 교회」 중에서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교부 시대를 장식한 또 다른 교부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였다. 그는 당시 이집트 속에 침투한 플라톤주의(Platonism)의 영향을 받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와 함께 동시대적 사상 훈련을 받았으며 특히 변호사로서 훈련을 거쳐 라틴의 제1 신학자로 부각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저인 Apologeticus(변증)에서 그는 몸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교회의 유기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을 통하여 교회를 ‘믿는 이들의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다.테르툴리아누스도 사도적 전승과 계승을 말하고 있으나, 이레니우스와 마찬가지로 교리의 전통과 그 계승을 의미했으며, 안수에 의한 교권적 계승을 의미하진 않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교리의 전통이란 신앙의 계율(canon of faith) 혹은 기록된 전통을 의미한다. 이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규범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신앙의 규율은 당시 이단 사상이었던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주의를 경고하고 또 시정하는 신앙적 규범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테르툴리아누스의 교회론은 본질상 이레니우스의 사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 「제3부 7장 _ 교부 시대의 교회론」 중에서
교회론 추구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유형은 프란치스코회 수사들(Franciscans)과 발도파(Waldensians)들이 모색한 교회상이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당시 교회의 타락 가운데 절대적 가난을 실천하였고, 제3 시대에 올 성령의 교회를 대망하였다. 발도파도 철저한 가난을 살면서 초대 교회(ecclesia primitiva)를 재연하는 회중을 꿈꾸었다. 이는 교황의 절대주의에 대한 신앙적 저항이었으며, 잃어버린 처음 교회의 신앙적 열정과 삶을 재연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은 그 의미와 윤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은 중세기 신학의 역사적 유산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교회론은 역으로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교회론에 대한 전적 부정에서 출발점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리처드슨(Cyril Charles Richardson)은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사상이야말로 개혁자들의 교회론을 뒷받침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그 처음은, 성서의 최종적 권위는 성령에 의하여 밝혀지고, 성서를 살아 있는 말씀으로 해석하며, 신앙으로 읽는 데서 그 권위가 오는 것으로 보았다.
--- 「제3부 9장 _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론」 중에서
그러기에 루터의 ‘Communio Sanctorum’은 로마가톨릭교회의 ‘Corpus Christi Mysticum’(그리스도의 신비적 몸) 사상을 성서적 ? 신학적으로 수정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교회론은 개인주의적, 경건주의적, 감정주의적 차원에 머물게 되는 약점이 있다. 신앙을 교회의 구성적 규범으로 강조한 루터의 교회론에는 종말론이 결여되어 있으며, 아울러 역사 속의 교회라는 차원이 약화되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초대 교회의 ‘함께함의 프락시스’(로핑크),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성령의 교제로서 교회’ 그리고 루터의 ‘성도의 교제로서 교회론’은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에 의하여 더 극단화되었다. 제3의 개혁(third reformation)으로 칭함을 받는 재침례파(Anabaptists)와 모라비아(Moravian) 교회는 코이노니아 교회론을 극단적 형태로 발전시킨 대표적 그룹이라 할 수 있다.
--- 「제4부 13장 _ 코이노니아로서 교회론」 중에서
하나님의 통치 사상은 사무엘상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과 사무엘 선지자 사이의 정치 토론에서 더욱 노출되었다. 사무엘의 경고에도 이방 왕과 같은 절대군주를 요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은 야훼 하나님의 통치권과 주권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배신이었다. 물론 야훼 하나님이 이를 용서하고 왕 세우는 일을 허락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이방 임금 같은 절대군주(ontocratic king)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나라를 섬기고 또 증언하는 제한된 왕(theocratic king)이었다는 사실에서 Basileia Tou Theou가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통치에 대한 정치신학적 해석이다. 두 범주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지배 능력의 양면성과 동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패트릭은 풀이한다. 여기서 두 범주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양자택일도 아니고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느냐도 아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Basileia Tou Theou)의 도래를 묵시문학적 종말론에서 해석하는 비비아노에 대하여 패트릭은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섰다. 패트릭은 공관복음서가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 콘텍스트(political context)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바실레이아(Basileia)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정치적 신정국가(theocratic state)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 통치’와 ‘이스라엘 통치’라는 구약의 정치 지배 사상의 신약적 수용으로 이해했다.
--- 「제5부 16장 _ 하나님 나라(Basileia Tou Theou)에 관한 성서적? 역사적 논거」 중에서
--- 「제5부 16장 _ 하나님 나라(Basileia Tou Theou)에 관한 성서적? 역사적 논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