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시피, 프랑스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위한 내 계획은 다면적이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런던에서 완벽에 가까운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 깡촌으로 이사 오면서 코미디·범죄 베스트셀러 소설 데뷔작을 쓰겠다는 계획에만 장래의 수입을 의존했을 리 없다. 그럴 리가, 변변찮은 내 포크에도 두 번째 갈래가 있다. 바로 브루어리. 프랑스에서도 최고급 와인을 만들어 내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나는 브루어리를 열 것이다. 다만 내가 아는 동네 사람들은 맥주에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맥주를 만들겠다는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에서 간과한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브루어리를 열려면 ‘실제로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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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으로 내가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몇 년간 내가 짓고 다니던 표정은 불행한 얼굴이었다.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똑같은 아침을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늘 입는 똑같은 옷을 주워 입고, 지하철에 탄다. 한 번도 머리를 쓰지 않았다. 그 전날도 그러했다. 출근해서 매일 같은 농담을 하고, 인터넷을 보고, 이류 그래픽 디자인을 조금 만들고, 집으로 퇴근하기까지 온종일 정말로 ‘생각’이란 것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전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진짜 생각을 해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진정한 어떤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몇 달 동안 아무 감정 없이 살았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살아 있지 않았다. 본능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정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위기의식이었다. 늦기 전에 탈출하라는 각성이자 마지막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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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자네가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어. 축하해! 자, 이제 솔직해도 돼.” 그녀는 윙크를 했다. “정리해고 당하려고 일부러 무능한 척한 거였지? 괜찮아. 여기서 자네는 전혀 행복한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자네에게는 변화가 필요했어.”
“아, 네. 맞아요. 그 점은 죄송해요.” 슬쩍 허를 찔린 기분으로 거짓말을 했다. 내 의지로 정리해고 가능성을 높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 나는 그냥 내 일을 썩 잘하지 못했다. 노력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일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늘 그게 문제였다. 회의. 사람들이 쓰는 용어. 어떤 이들은 사무실에 들어와 순식간에 승진한다. 옳은 말만 하고, 회의 시간에 다른 동료들을 켄타우로스로 바꾸어 낙서하는 대신 제대로 된 의견을 낸다.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안다. 반면 나는 여전히 이 일을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다른 일을 하기 전에 거치는 임시방편 정도로만 여겼다. 오래 머물 생각이 없으니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냥 임시방편이었다. 12년간의 임시방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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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을 따고 치익 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절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을 기어코 해냈다는 자부심이 가득 차올랐다. 그 기분도, 지속 시간도 처음 섹스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맥주를 맛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거품도 있고, 알코올도 들었고, 맥주 맛이 났다. 시트라 홉 향이 스며 있었다. 나는 천재다!
“너무 써요.” 다미앙이 말했다. “그리고 웃긴 냄새가 납니다.”
순간 나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다미앙에게 프랑스인들은 맥주를 전혀 모른다고, 그냥 웃통을 벗고 일광욕이나 하면서 빌어먹을 자동차나 계속 만들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맛을 보았다. 그가 옳았다. 사실 그가 옳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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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에는 보편적인 냄새가 있다는 것이 나는 가장 흥미로운 점이라 생각한다. 쓰레기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쓰레기의 내용물에 따라 물론 각기 다른 냄새가 나겠지만, 더불어 나는 일반적인 쓰레기 냄새는 세계 어디나 다 똑같다. 평소에는 내가 변함없는 세상에 살고 있구나 안심시키는 닻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데, 새 브루어리에서 첫 번째로 만든 맥주에서 그 냄새를 맡자 기분이 무척 저조해졌다. 발효가 끝난 맥주에서 쓰레기통 냄새가 났다. 이것은 다 저 망할 발효조 때문이다. 그래, 저 통을 쓰면 안 되었는데. 전에 플라스틱 발효조로 똑같은 실수를 해놓고 그 짓을 또 반복하다니. 미쳤군. 미치지 않고서야 똑같은 짓에 다른 결과를 바라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야말로 머저리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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