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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 괜찮다고 했지만 그리 괜찮지 않았던 날의 서사

윤슬 | 담다 | 2021년 02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7 리뷰 22건 | 판매지수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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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66쪽 | 380g | 130*200*20mm
ISBN13 9791189784096
ISBN10 1189784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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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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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주무시는 것을 확인한 후, 불을 껐다.
--- 「첫 문장」중에서

아주 가끔 상상하긴 했었다. 만약, 남편이 최 씨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귀농해서 살자고 얘기하면,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겠다고 이 도시를 떠나자고 말을 건네 온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라고. 하지만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지금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큰일이다. 연습도 없이 바로 문제부터 풀게 생겼다.
--- p.24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살아있는 느낌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말은 삶의 은유’라는 거창한 메시지에는 포함되지 못하겠지만, 지후 스스로 찾아낸 가장 인간적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절차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더 이상 지후의 행동이 걱정스럽게 느껴지거나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다. 날마다 뉴스를 전해오는 행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이해가 안 된다’라는 말로 삶의 연속성을 이어나가려는 모습에 안도감이 느껴졌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 p.38

“네, 고객님.”
고객센터 직원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맑고 상냥했고, 청량하기까지 했다. 이쪽에서는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났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참 제가 지난번에… 아니… 그 러니까 일이 어떻게 되었냐….”
나의 참혹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 담당 기사님이 도착할 거라면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10분. 10분이 그렇게 긴 시간인지 몰랐다.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11분, 12분, 15분.
대포 소리는 새로운 화음을 만들지 못한 채 전력을 다해 터지고 있었다.
빵. 빵. 빵.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어떻게 좀 해보세요.”
“금방… 온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도로 가장자리로 보험회사 차량이 진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후유… 다행이다….’
--- p.48

수빈과 갱년기 사이에는 어떤 설명이 필요했다. 누구보다 긍정적인 그녀, 인색하지 않으면서 호의적인 태도가 매력적인 그녀, 잠시 기가 죽는 모습이 보이다가도 이내 바지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몸을 움직이는 그녀와 갱년기를 연결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딱딱한 무언가가 가슴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 p.69

작년에 대입 시험도 시험이었지만, 진영은 함께 살던 강아지가 죽어 많이 힘들어했다. 사람처럼 몸에 암이 퍼져 걸을 수도, 먹을 수도 없게 된 강아지. 결국 진영의 부모님은 안락사를 결정했고, 진영이 학교에 가고 없을 때 화장시켜 장례까지 마쳤다고 전해 들었다. 뒤늦게 학원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진영은 집으로 달려갔고, 울면서 달려가는 진영의 뒤에는 미희와 내가 있었다. 그날 밤, 진영은 어디에서 장례를 치렀는지 알아냈고, 혼자 가겠다는 진영을 걱정하며 따라가서는 문 앞에서 셋이 엉엉 울다가 돌아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동안 진영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기억력 좋은 미희가 듣자마자 이름을 기억해 낸 것이다.
--- p.83

계획에도 없던 아들의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공부에 대해 큰 뜻은 없었지만 다행히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아들 주위에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SKY를 꿈꾸는 친구, 외국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 진로탐색을 위해 방학동안 도서관 자원봉사를 신청했다는 친구까지, 지희의 둘째가 그중에 한 명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단짝이었는데, 같은 고등학교에 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아들은 복(福)을 조금 타고난 것 같았다. 주위에서 운동 그만두고 나면 옆으로 빠진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운이 좋게도 아들은 그러지 않았다. 친구 따라 강남가는 분위기로 수학 학원도 자발적으로 등록했다.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은 놓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과 학원 선생님이 얘기하는 가장 어려운 구간, 아들은 중간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상담을 갈 때마다 선생님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상황을 전달했다.
--- p.162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아이가 맞나 싶었다. 생각이 깊은,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는 세상 물정 잘 아는 야무진 대리가 아니었다. 세상에 다시 없는 바보처럼 보였다.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미대 졸업반, 3살 연하,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위로 누나 셋. 디자인 공부 중.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도 심기가 불편한지 커피잔만 올렸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쩐지 긴 머리가 처음부터 마음에 걸리더라, 번쩍거리는 장식이 불편했던 것은 조명 탓이 아니었구나, 여자의 직감은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 진짜구나, 여러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 남편과 나는 친구 모임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 p.205

어머니를 보내드린 뒤, 남편은 그럭저럭 잘 보내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저녁 먹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찾아보면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갔으려니 했다. 하지만 한참이 흘러도 남편은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에도 없고,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며 찾아보다가 어머님 방을 열게 되었다. 혼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남편을 발견하고는‘여기서 뭐하고 있어?’라고 물으면서 다가갔다가 발이 땅바닥에 붙은 것처럼 얼어버렸다. 어머니 영정사진.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을 부여잡고 있는 남편. 그랬다. 남편은, 남편은 아직 어머니를 보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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