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의 새로운 장군인 하스드루발은 팔레르모를 공략했다가 패배하여 2만여 명의 인명 손실을 초래했다. 전쟁에 지친 카르타고는 같은 상황에 있을 적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리고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포로로 잡혔던 레굴루스 장군을 사절단과 함께 로마에 파견했다. 레굴루스는 평화 협상이 결렬될 경우 다시 돌아온다는 조건하에 석방되었다. 원로원은 카르타고의 제안을 수락하고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레굴루스에게 공개적으로 연설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레굴루스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로마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평화 회담은 결렬되고, 그는 부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적들은 레굴루스에게 죽을 때까지 잠을 못 자게 하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혁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결코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중심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이들의 역할은 다만 무력을 빌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귀족 계층과 부르주아가 그 결과를 누리게 된다. 혁명은 항상 일종의 자살과 같다. 계급은 스스로 붕괴되기 전에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모든 권력과 지휘권의 상징인 최고 권력의 휘장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술라에게 주위의 행인들이 욕을 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술라는 자신을 험악한 얼굴로 쳐다보는 촌부의 곁을 무관심하게 지나치면서, “멍청한 놈! 나를 제외한 지구상의 그 어느 독재자도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부호이며, 세련된 웅변을 통한 광장의 군주이며 그리고 ‘조국의 아버지’인 키케로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제일 중요한 것, 즉 가정의 평화를 얻지는 못했다. 부인 테렌티아는 도덕심이 강하고 참아내기 힘든 까다로운 성격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불치의 류머티즘과 남편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화술로 남편인 키케로의 삶을 매우 고달프게 만들었다. 한 집안에 두 명의 웅변가란 너무 많은 편이다. 광장의 군주인 키케로도 집에서만은 주도권을 부인에게 넘겨주었으며, 이로 인해서 끝없는 불평의 소리들을 견뎌내야만 했다.
카이사르는 적지 않게 벗어진 머리에 사각형의 앞이마 그리고 비뚤어진 일직선의 두툼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아랫입술이 윗입술의 절반 정도를 덮고 있어 결코 미남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네 명의 여성과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부를 거느렸다. 군인들은 카이사르를 ‘대머리 오입쟁이’라고 불렀으며, 승리의 행진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부인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세요. 대머리 유혹자가 돌아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노래했다고 한다. 물론 카이사르는 자신을 놀리는 소리에 가장 먼저 웃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조국과의 전쟁에서 패할 경우 배신자의 오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자신을 따르겠는가를 물었을 때 군인들은 만장일치로 지지를 표명했다. 카이사르는 대부분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 출신의 갈리아인들로 구성된 부하들에게, 원로원의 반대를 물리치고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조국은 곧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가 봉급을 지불할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말했을 때에도, 이들은 자발적으로 자금을 모아 군단의 비용을 충당했다. 단 한 명, 티투스 라비에누스만이 카이사르를 떠나 폼페이우스의 진영으로 건너갔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평소에 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보좌관으로 생각했던 배신자에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소지품과 그동안의 봉급을 보내주었다.
세네카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지만, 호화스러운 삶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소식을 하고 음료로는 물만 마셨으며, 탁자에 엎어져 잠을 자면서 서적과 예술 작품을 구입하는 데에 모든 재산을 소비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부인에게 충실했으며, 권력과 돈을 지나치게 추구한다는 주변의 비난에 대하여는 ‘그러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삶보다는 내가 살아야만 하는 삶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의 삶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정한 삶의 모델을 추구할 뿐이다’라고 답했다.
마르쿠스 황제는 평화를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무려 6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여 콰디족, 랑고바르디족, 마르코만니족, 사르마티족과 같은 강력한 적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그러나 전투를 벌인 후에는 자신의 천막에서 홀로 쉬면서 조용히 ?명상록?을 썼다. ‘거미는 파리를 잡았을 때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사르마티인을 포로로 잡은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둘 다 좀도둑에 불과하다.’ 그리고 황제는 다음 날 다시 사르마티족과의 전쟁을 계속했다.
기원후 219년, 어느 봄날 로마는 역사상 가장 이상한 용모로 입성하는 제위 계승권자를 목격하게 되었다. 소년은 온 몸을 붉은 비단옷으로 휘감고, 입술에는 붉은 루즈를, 속눈썹에는 헤나 염료를 바르고, 목에는 진주목걸이를 걸고, 손목과 발목은 에메랄드로 만든 팔찌와 발찌로 치장했으며, 머리에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시민들은 소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당시 이러한 상황은 로마의 사정을 고려할 때 그리 심각한 일도 아니었다. 만약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오늘날의 법정에 세울 경우, 그가 그리스도교 문명에 기여한 공로는 재위 기간에 저지른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무죄 선고를 받기에 충분할 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국의 심판 앞에서 어떤 판결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제 어엿하게 군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율리아누스는 명령에 마지못해 복종하면서, 휘하의 군인들과 이별해야만 하는 심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상관의 착잡한 마음을 명령불복의 의지로 해석하고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이에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서한을 보내 부하들의 행동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황제가 카이사르의 칭호를 반납하고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하라는 답장을 보내자, 율리아누스는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자신의 군대 앞에서 정면대결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비유적인 표현을 빌리면, 당시의 율리아누스는 은행을 턴 것이 아니라,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소유하게 된 장물의 반환을 거부한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의 유럽이 경험한 재앙이 그리스도교와 북유럽 지역과 동유럽 지역으로부터 밀려들어온 야만족들의 침략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았다. 다만 이교의 시신(屍身), 즉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 이교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 빈자리를 채웠을 뿐이다. 종교는 신을 숭배하는 사원을 건축하거나 구체적인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상의 도덕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과거의 이교는 이런 규정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출생했을 때에는 과거의 이교적인 규범들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으며, 인간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또 다른 삶의 규범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고대의 규범들은 새로운 종교의 등장으로 몰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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