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생각하는 1월의 오후. 누군가 내 머릿속의 건반을 퉁-누르고 간다. 여행은 솔. 기분 좋은 솔이 이마에 울려 퍼진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나는 채석강의 밀물 소리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왈츠 선율을 배경으로 해왕성을 향해 나아가는 보이저 2호의 아득한 뒷모습을 상상하며 하루를 살고 있다.
--- p.15, 「여행은 솔, 기분 좋은 솔」 중에서
인생은 짧지. 그러니까, 쓰잘 데 없는 책을 쓰고 있지만, 쓰잘 데 없는 책을 읽기엔 아까운 것이 인생이지. 게다짝을 끌고 방으로 돌아와서는 이시카와 타쿠보쿠를 읽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이런 깊은 숲 속의 겨울밤에는 이런 대책 없는 생활파탄자의 시가 어울리는 법이지.’ 만남은 서로의 책임이야. 뭐든 지나치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 p.19, 「어디론가 가고 있을 때만이 위로이니까」 중에서
노장의 시선은 세상과 조용히 마주 선다. 길과 나무, 사막, 텅 빈 거리, 밤의 상점, 버려진 자동차, 창 밖의 풍경, 구름의 어울림…… 노장의 시선에 붙들린 풍경은 견고하고 고독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불쑥 다가서는 순간들 미미한 시간의 이어짐들…… 그것들은 모두 고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며, 그의 사진을 읽으며 “나에게서 멀어지고 빗나간 것들”과 문득 만난다.
--- p.58, 「나에게서 멀어진 것들과 마주하는 시간」 중에서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숨이 막힐 만큼 거대한 규모 앞에 서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경험은 분명, 좁디 좁은 생활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안 깊숙한 곳에 몇 평 무(無)의 공간을 마련해줄 테니까. 연암을 다시 읽다가 문득 이 문장 앞에 멈춰 섰고 내가 만났던 몇몇 거대한 풍경을 떠올렸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 속 풍경 역시 퇴색하지만, 아직도 그 풍경들은 내 마음속에 또렷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풍경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허무해지고 조금은 고독해지고 그만큼 생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 p.81, 「나를 살게 하는 허무의 감각」 중에서
죽음을 몇 달 앞둔 여든 한 살의 테라스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 건 들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돌아가 봐야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걸, 최선을 다해봐야 그다지 바뀌는 것이 없다는 걸 그때쯤이면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고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즐거움과 사랑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인데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놓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 p.86,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지」 중에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아야 하고 운명은 강처럼 흘러가며
사랑은 생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것
사막을 등지고 집으로 들어온 낙타처럼
생을 등지고서야 비로소 생을 안을 수 있다는 것
--- p.105,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밤 이후」 중에서
당신을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길을 멈추진 않겠지만, 내 인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끔 멈추어야 할 것 같아요. 이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무언가를 위해서 남은 인생을 바칠 결연한 다짐을 하기보다는 그냥 가끔 맛있는 것이나 먹으며 즐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랍니다. 그 왜, 앞에서 제프 다이어의 이런 문장을 인용하기도 했잖아요.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 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라는. 뭐 어쨌든, 이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 p.169, 「가끔은, 멈추어야 할 것 같아요」 중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느 해 혹독했던 겨울이 아니라 그해 추웠던 겨울, 당신의 손을 꼭 잡고 걸었던 협재해변과 귤밭 위로 내리던 찬란한 햇살, 당신의 이마에 내려앉던 노을, 그리고 당신에게 건넸던 꽃 한 다발일 거예요. 우리는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몰라요. 불현듯 노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겠죠.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고, 모든 일에 덤덤해지겠죠. 이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것이구요. 그러니까, 어둡고 차갑고, 끝내 상실로 가득할 우리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 오직 그것.
--- p.184, 「우리는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몰라요」 중에서
카프리의 우편배달부가 파도에서 운율을 깨달았듯 내 모든 여행은 당신에 관한 여행, 당신에 관한 적절한 비유를 찾기 위해 떠났던 여행.
사랑에 관해 쓰려다가 팔베개를 한다.
구름 지나간 하늘, 잠자리 날개가 떠 있다.
생은 사랑이 아니면 여행이겠지.
--- p.257, 「생은 사랑이 아니면 여행이겠지」 중에서
파스칼 역시 알랭 드 보통과 마찬가지로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라고 했지만, 그래도 떠나는 편을 택하겠다. 다리에 쥐가 나고, 벼룩이 득시글거리는 침대에서 자고, 흙 냄새 나는 쌀국수를 먹더라도 일단 떠나고 보겠다. 피라미드 앞의 낙타 호객꾼들은 정말 지겹지만, 그래도 피라미드는 다시 보고 싶다.
여행을 하며 깨달은 건 삶은 모험이라는 것.
모험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 p.266, 「우리는, 나는, 왜 여행을 떠날까」 중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5년 전 내가 세웠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좋은 일만 일어나길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우연의 인생을 대하는 더 적당한 태도일 것이다. 나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이런 주문을 외우곤 한다.
‘다 잘될 거야. 모든 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 p.343, 「모든 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중에서
그래도 우리의 사랑이(여행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사랑(여행)이 없다면 생이 얼마나 밋밋할까요, 지루할까요, 권태로울까요. 모험이 없으면 경이가 없는 법. 내가 당신에게 고백을 하고 배낭을 꾸려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이 때문이겠죠. (지난번의 지루했던 사랑을, 위태로웠던 여행을 잊어버린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자, 어쨌든, 두 손을 맞잡고 국경을 훌쩍 다시 넘어봅시다. 저 너머엔 우리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해줄 만한 뭔가가 있겠죠. 오늘은 사랑하기(여행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 p.349, 「오늘은 사랑하기 좋은 날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