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라쉬는 이런 신명기 말씀 안에는 하나님 명령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책망이 약간은 가리어져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은 죄에 대해 단지 암시해 주기만 하려고 완곡한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는 것이다. 모세는 왜 신명기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그렇게 완곡하게 표현했을까? 혹시 백성을 너무 심하게 책망하면 그들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줄까 봐 그랬던 것일까? 혹시 이제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둔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저지른 죄를 생각나게끔 하여, 그들이 여전히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로 그랬던 것을 아닐까?
--- p.35
탈굼 옹켈로스가 전하는 말씀 2절과 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가감하는 행위와, 하나님이 바알브올 우상숭배자들을 멸망시킨 행위를 병렬하여 선포하고 있다. 이 둘 사이를 서로 병렬하여 연결하고자 한 것이다. 맛소라 텍스트와 아람어 탈굼 모두, 하나님 말씀에 뭔가 보태거나 빼는 행위는, 곧 우상숭배나 간음죄와 같다고 보는 데는 공통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그동안 랍비들은 하나님 말씀과 명령을 가감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따라서 이런 범죄를 짓지 않도록 얼마나 각별히 유의해야 하는지에 관해 그동안 많은 논의를 가졌다.
--- p.50
그중에 28:1절은, 즉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네가 여호와 말씀을 삼가 듣고 행하면”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삼가 듣는다’고 옮긴 ‘솨모아 티쉐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실하게 순종한다’는 뜻이다. 한편 ‘솨모아’와 ‘티쉐마’ 두 단어 모두는 ‘쉐마’라는 낱말에서 비롯되었다. ‘쉐마’는 말을 잘 경청하며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까지를 아우른 단어이다. 첫 번째 단어 ‘솨모아’는, ‘잘 듣고 경청하는 것’을 뜻하는 능동형 명사이고, 두 번째 단어 ‘티쉐마’는 과거형이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은 능동형 미완료 남성 2인칭 단수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본은 이것을 ‘삼가 듣고’라고 옮겨 놓았지만, NASB는 이 단어를 ‘성실하게’ 또는 ‘부지런하게 순종한다’고 번역하여 그 의미를 더 강조하고 있다.
--- p.72
이상에서 소개한 8가지 주요 모에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로 예배하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들이다. 이는 주의 백성 모두에게 ‘기쁨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74편을 읽어보면, 일부 몰지각한 자들은 기쁨과 감사의 시간이 되어야 할 모에딤 절기에 어려운 이들을 돌봐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고 억압하였고, 성소에서 온갖 추악한 짓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고 말한다. 이것은 70인역에 더 분명히 드러나 있다. 70인역(시74:3)에는 이들을 대적자(원수)라고 못 박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철저히 자기들의 영광만 구했기 때문이다.
--- p.90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대랍비들은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고, 설령 7년에 한 차례 사형을 집행했을지라도 이 광경을 매우 끔찍하게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이것과 관련해 람밤은 이렇게 말했다.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죽게 하는 것보다 죄인 천 명을 풀어주는 것이 낫다.” 또 람밤은 만약 법정이 죄를 입증할만한 확고부동한 증거 없이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은, 판사가 피고의 죄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지 자신의 육감만으로 판결하려고 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로 인해 법원 스스로가 사법적인 권위를 실추시킨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경고하였다.
--- p.130
먼저 탈무드가 말하고 있는 토론 주제를 요약해 보자. 랍비들은 신26:13절에 ‘내가 거룩한 몫을 내 집에서 떼어내어’라는 말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면서 이 토론을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주께 바치는 십일조에 관한 믿음이 과거의 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전 세대 사람들은 자기들이 내야 할 십일조를 감당하기 위해 집 안에 과일을 들여올 때는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통해 운반하곤 하였는데, 나중 세대들은 어떻게든 이를 면제받으려고 부엌문으로 들고 오지 않고 지붕이나 담장을 통해 운반했다는 것이다.
--- p.147
맛소라 텍스트와 아람어 탈굼 번역을 비교해 본 결과,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오늘 우리가 예배를 통해 듣게 되는 설교처럼, 말씀(메므라)의 소리로써 임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주의 메므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며, 이는 결국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말처럼, 하나님 말씀인 메므라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전하는 사람이 선지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전하는 토라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며, 그 외침을 계속 듣지 않는다면 언젠가 토라를 듣지 않은 책임을 묻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 p.166
라쉬는 모세가 이렇게 명령한 이유에 대하여, 그다음 신32장에 모세가 노래를 지어 가르친 Parashat Ha’azinu)를 듣고, 이스라엘이 즉각 이 노래로 지어 기록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탈무드 바블리 네다림 38a절을 보면, 토라를 기록하라는 명령이 구약의 토라 전체를 가리킨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이 본문에 나오는 ‘노래’라는 말에 주목하였다. 비록 ‘노래’라는 단어가 다음에 나오는 신32장의 하지누를 가리킨 것이 맞다 할지라도, 탈무드에서는 토라의 어느 한 부분만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모세의 이 명령은 결국 토라 전체를 기록하라 명령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p.190
노래의 끝부분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이 노래의 모든 말들을 백성들이 듣도록 전했다고 말한다(32:44). 그런데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여호수아의 이름이 이제까지 앞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성경 전체에서 볼 때 그의 이름은 대개 경우 ‘여호수아’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신32:44절에서는, 그 이름을 호세아라고 부른다. 참고로 민13:16절을 보면 “바익케라 모쉐레호쉐아 벤-눈 예호수아” 즉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라고 말하고 있다. 오경에는 그의 이름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 목록으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 p.200
이와 같이 랍비들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세상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바로 그것들이 이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할 때, 이미 머릿속으로 자기가 만들려고 하는 물건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 생각하고 이미지들로 존재하였던 ‘그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