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이야기나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가 납득이 안 가다 보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묻지 마 신앙이 한국교회에 판을 치고 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신앙이 참다운 신앙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대다수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목사님의 말을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복종하는 것이 신앙으로 통한다. 이런 맹종이 맹신을 낳고, 맹신은 잘못된 확신을 낳으며, 그릇된 확신이 지나치면 광신을 낳는다. 진정성 있는 신앙은 정직한 신앙에서 오며, 정직한 신앙은 묻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신앙에서 온다. 의심과 비판을 두려워하고 백안시하는 신앙은 결국 관습적 신앙, 그야말로 믿기 위해서 믿는 신앙, 사회생활의 일부가 된 교회생활을 위한 신앙이 되고 만다.
---「머리글 _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중에서
복음주의 신앙에는 무엇보다도 예수 자신이 명한 대로 십자가의 뼈아픈 자기부정의 길을 가야 한다는 의식이 별로 없다. 예수를 따라 살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인간의 죄악성과 그리스도의 은총을 강조한 나머지, 우리 같은 죄인들로서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따를 수 없고, 또 이미 죄 사함을 받았으니 따를 필요도 없으며, 따르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값싼 은총’을 복음이라고 남발하는 것이다…
성서나 기독신앙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성서 이야기들의 사실적 진리를 따지기에 앞서 그 뜻과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나의 존재와 삶에 결정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오히려 사실적 진리의 문제에도 더 진지하게 다가갈 수 있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일단 의미의 문제로 넘어가면, 단순한 사실적 진리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의미의 진리가 관심사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의미의 진리를 나 자신의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내 인생을 걸고 살 수 있는지 또 그래야만 하는지, 진지한 자기 성찰과 신앙의 결단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신뢰하는 믿음의 진짜 테스트가 여기서 시작된다
---「1부 _ 위기의 신앙, 교회 너머 신앙」중에서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에 근거한다 해도,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언어와 생각과 지식은 여전히 유한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전달되는 한, 하나님의 계시도 역사적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의 역사성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되며, 인간의 언어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
무한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끊임없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사실은 하나님은 기독교 신자도, 이슬람 신자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물며 어느 교파나 어느 대형교회 신자이겠는가? 신앙인들은 너무나도 명백한 이 사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고 하나님을 자기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유혹에 빠지고 있다…
하나님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초월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하나’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숫자적 의미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숫자를 초월하는 의미의 하나이며, 숫자 아닌 숫자, 수를 가진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서의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숫자를 가진 모든 유한한 사물의 배후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무한하고 포괄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와 여럿, 일과 다는 반대가 아니라 ‘하나’ 하나님 안에서 상통한다. ‘하나’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사물에 통하고 사물 사이에 막힘이 없도록 하는 ‘무차별적’ 실재이다…
‘하나’는 무한의 다른 이름이다. ‘하나’는 결코 여럿과 대립하는 상대적 하나가 아니라 절대적 하나이다. 참 절대는 상대적인 것들과 차별화되고 대립하는 절대가 아니다. 상대와 대립되는 절대는 참 절대가 아니라 상대적 절대에 불과하다. 참 절대는 상대를 포섭하고 포괄하고 초월하는 포월적 절대이다.
우리는 유일신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영성을 풍부하게 가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코 신앙의 획일성과 편협한 배타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기뻐하는 개방과 긍정의 영성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는 무한자 하나님의 넓은 마음과 여유로움을 닮는 영성이다. 또한, 만물 가운데 계시며 만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성이며,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영성이다. ‘하나’ 하나님은 결코 여럿을 배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럿을 품고 기르는 하나님이며, 언제 어디에서나 중심이 되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부 _ 포월적 절대 ‘하나’ 하나님」중에서
도대체 우리는 왜 회개를 해야 하고 왜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해야 하며 무슨 이유로 뼈아픈 자기부정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세상을 따라 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왜 육에 따른 삶을 청산하고 영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하며, 또 그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가? 남들이 하는 대로 인생을 좀 쉽게 살고 물 흐르는 대로 살면 되지 왜 굳이 세상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가? 왜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행군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천국 메시지를 듣고 응답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냥 현실에 적응하면서 편하게 사는 사회적 자아로 만족하면 안 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천국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응답하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 안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삶을 본받고 예수의 영성을 실천하려는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일까?…
초월적 자아, 영적 자아가 우리의 속사람이고 참나인 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이 참나를 깊이 자각하고 실현하는 데 있다. 우리가 좁고 이기적인 자기를 부정하고 죄악 세상을 거슬러 사는 부정의 영성에 끌리는 것도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참나의 부름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인간성의 실현은 동서고금의 성현들이나 영성의 대가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 온 인생 최고의 목표이다. 세상을 거슬러 산다는 것,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렵고 괴로운 일이지만, 이는 사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자아를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
죽음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세계라고 부활신앙은 말한다. 창조의 하나님은 동시에 종말의 하나님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이라고 기독신앙은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에서 현세를 더 의미 있고 값어치 있게 살아가려는 존재이다.
---「3부 _ 죽음의 초월: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