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동아시아 근대사’라는 입구로 들어가 ‘인류사’라는 출구로 나옵니다. 서세동점으로 오랜 시간 곤경에 처했던 동아시아가 오늘날 다시금 당당한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외부의 포식이 아니라 내적 자기증식에 기초했던 내장적(內張的) 발전양식, 생활양식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내장적 저력의 재발견과 귀환은 이제 전 지구적 요청과 맞물리고 있습니다. 외부의 포식에 기초한 무한팽창의 신화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존멸을 묻는 기후위기와 ‘지구선택’의 상황은 무한팽창이라는 환상의 종언을 극적으로 예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류문명은 무한팽창적 지향과 가치를 버리고 내장적 질서로 회귀해야 합니다.
--- p.12~13, 「책머리에」 중에서
얼마 전 이들 ‘뉴라이트’ 운동의 학계 구성원을 이루는 분들이 몇 모여서 자신들의 평소의 소신을 대담하게 펼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냈더군요. 저는 이 책을 읽고 정말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역사와 특성에 대해서는 몽땅 비하하고 일본과 서구 문명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양하여 숭배하고 있습니다. 미리 역사를 흑백과 우열로 전제해놓고 이야기를 짜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역사를 대할 때라도 이러한 태도는 배격되어야 합니다.
--- p.112, 「形」 중에서
동아시아의 내장(內張)근대란 이렇듯 대륙과 바다, 그리고 습윤과 건조의 교류와 공존을 통해 대단히 광대한 범위에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대륙/바다, 습윤/건조의 광대한 상호작용이 바로 붕새를 날게 했던 동력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합니다. 이러한 내장적 질서가 오랜 시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공존의 질서 속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평화공존의 질서 속에는 동아시아 바다에까지 이르러 활발히 활동했던 네덜란드와 영국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p.172~173, 「形」 중에서
유교 국가론의 바탕을 이루는 ‘민유방본’의 철학은 당시 유럽의 계몽철학자들에게는 대단히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마 오늘날의 독자들은 과거의 유럽이 동아시아의 유교 체제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전인수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역사를 볼 때 과거를 자기 시대의 눈으로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p.217, 「形」 중에서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오랜 기간 안정, 평화, 번영을 누리며 존속했던 유교형 내장주권체제의 역사적 경험을 눈을 비비고 새롭게 다시 보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야만 하는 때가 아닐까요? 유교 내장주권이 서구 팽창주권의 힘 앞에 패배했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 패배는 영영 잊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패배를 통해 기억 속에 깊이 상처로 남아서 오히려 새롭고 더욱 완성된 형태로 부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말하는 ‘창조적 재해석’은 유교에 대해 진정으로 비판적인 대면을 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 p.258, 「形」 중에서
토지균분은 정전제 이래 유교 이념의 오래된 이상에 해당하고, 조선의 많은 개혁적 유자들이 이러한 이념의 구현을 주장해왔습니다. ‘정전제’란 오늘날 주목받는 ‘기본소득’ 구상의 유교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학자들이 늘 주장해온 정전제, 균전제, 한전제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 모두가 결국 일반 농민들이 항산(恒産)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념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유교적 이상사회에서 농민들이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는 오늘날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일반인의 삶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p.328, 「流」 중에서
후기근대의 상은 부동하는 경제적 네트워크에 단속적으로 접속하는 새로운 소생산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세계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소민의 소멸이 아니라, 정반대로 새롭게 소민이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소민사회’로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복지제도나 기본소득은 후기근대의 환곡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재분배경제), 성장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 다양한 형태의 중간경제는 이 시대의 새로운 두레(호혜경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p.332~333, 「流」 중에서
“이념이나 이론에만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현실의 권력이 되었던 ‘현존 자본주의’, ‘현존 사회주의’는 모두 팽창근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성장 지상주의나 대결적·공격적 대외관계 등 서로 공유하는 점이 많았던 것이죠. 자연 생태를 완전히 외부화시켜서 그 희생 위에 산업화를 추진했다는 점도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사회주의 구분보다 팽창근대/내장근대의 구분이 더 기본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 p.485, 「勢1」 중에서
글쎄요. 미중 간의 전쟁, 그리고 여기서 시작될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인데요, 그러한 가능성이 100%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현 상황을 ‘패권 교체’로 보는 시각의 결정적 맹점은 오늘날의 상황을 ‘팽창근대 500년 논리의 연장’으로만 읽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제 ‘팽창근대 500년’이 종식되고 있는 만큼, 세계사의 흐름을 과거 500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과 논리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있어요. 큰 변화를 놓치고 있으니 잘해야 사태의 반쪽밖에 못 보는 것이고, 결국 완전히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 p.609, 「勢2」 중에서
코리아 양국체제 정립은 결코 코리아만의 국지적 사건이 아닙니다. 세계사적 의미가 있어요. 70년간 극단적으로 적대해왔던 두 주권이 평화적 공존의 과정을 통해 통일로 간다는 것은 토머스 홉스나 카를 슈미트가 생각했던 근대 주권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질적으로 다른 주권관이 여기서 나올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권이란 홉스적, 슈미트적 의미의 ‘적대적 외부’를 전제하지 않는 ‘내장적 주권’이 되겠지요. 새로운 주권모델을 코리아 남북에서부터 만들어간다는 포부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팽창근대의 주술을 여기서부터 끊고 내장적 문명으로 가는 길을 힘을 모아 같이 열어가자는 것입니다.
--- p.649~650, 「勢2」 중에서
21세기의 다극화는 서구의 전 지구적 패권확장의 지난 역사와 크게 다릅니다. 새로운 단일패권 형성이 아닌, 상대적으로 동등한 다극의 형성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다극관계는 냉전시대처럼 양극이 서로 배척하는 적대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상호의존이 갈수록 증대하는 관계입니다. 각 권역 내부에서도 이제는 어느 한 나라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는 것은, 남미에 대한 미국의, 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중동에 대한 서유럽의 영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여러 권역 내 각국의 힘의 상대적 증감은 물론 발생하고 있지만, 권역 전체로 보면 그 힘 관계는 분명 다극화·수평화되고 있습니다. ‘팽창근대의 낙차에너지’가 구조적으로 약화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팽창근대가 팽창의 극에 이르러 그 반대물인 ‘내장근대의 세계화’로 나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 p.690, 「形′」 중에서
여기까지만 보면 슈미트는 사상가로서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슈미트의 사상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순간, 그 사상은 정상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하는 운명이니까요.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팽창근대와 내장근대의 변증법’에 의해 팽창근대가 지구 끝까지 남김없이 정복한 순간, 팽창근대의 세계사적 역할은 그것으로 종료되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그의 사상은 결국 실패와 몰락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 책에서 논의했던 논지 전체가 카를 슈미트의 예외권력론에 대한 반증이자, 그의 사상의 예고된 자기붕괴 앞에 울리는 조종(弔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825, 「形′」 중에서
뜻밖에도 2020년의 코로나19 팬데믹이 이러한 진실을 인류사회에 널리 알려주었습니다. 기존의 무한히 소비지향적인 삶의 양식과 가치를 바꾸지 않는다면 바이러스에 의해서든, 기후위기에 의해서든 인류는 빈번한 재앙에 의해 치명적 곤경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아울러 팬데믹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덜 쓰고, 덜 움직이고, 덜 만들고, 덜 누려도,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오히려 더불어 더욱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아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본소득, 적극적 재정, 고용보험, 돌봄경제, 공공의료 등이 그렇지요. 이런 발상을 확대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내장적 사회이기도 합니다.
--- p.850, 「形′」 중에서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란, 장기간의 유교 문인공동체의 군주권 견제와 민(民)의 수평화 과정을 토대로 하여, 군주제가 공화제로 대체된 이후, 민의 통치 참여가 본격화하는 정치체제이자 사회현상이다, 라고 말이죠. 또한 동아시아에서 ‘민의 수평화’ 그리고 ‘지식인의 공화주의적 비판 전통’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미래 발전 가능성도 더욱 큽니다.
--- p.893, 「形′」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