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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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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김한아 | 알마 | 2020년 12월 0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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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2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320g | 130*213*20mm
ISBN13 9791159923234
ISBN10 11599232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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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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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가 교무실 문 앞에 섰을 때였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양소영 선생 막 입고 다니는 건 여전해. 요새 애들, 선생들 옷 브랜드 귀신같이 알아내는데.” 못마땅하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폭탄 처리반이잖아요. 묵언수행 중이랍니다, 그 아이. 뭐 우리한텐 좋은 일이지요.” 울림통이 큰 목소리였다. 양소영 선생이라면 한나의 담임이 될 사람이다. 폭탄이라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한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나는 안에서 하는 이야기 소리가 멈추자 노크를 하고 교무실 문을 열었다.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덩치가 큰 선생님은 한나를 보자마자 묵언수행 중인 전학생인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무런 말없이 수어를 하는 사람처럼 유리창 근처에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상체를 숙이고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를 하고 있었고, 까맣고 긴 생머리는 물결 모양을 이루며 허리께까지 늘어져 있었다. 큰 책상이 하체를 가리고 있어서 한나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야, 몸 전체가 보였다. 양소영 선생은 한쪽 귀에 전화기를 낀 채 뭔가를 적고 있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중에서

여름의 머리는 지난 주 내내 유교 걸이 보기 좋은 머리라고 칭찬했던 것에서 투 블록 커트로 바뀌었다. 수학 시간 유교 걸은 여름의 짧은 단발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보였고 여름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 문제를 가볍게 풀어나갈 때는 여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수진이 “또라이 년”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한나는 들을 수 있었다. 여름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스프레이를 꺼내 머리에 뿌리며 말했다. “정전기 때문에. 레몬즙으로 만든 거야. 냄새 괜찮지?” 여름의 머리에 수많은 물방울이 내려앉았다. 여름이 손가락 빗질을 할 때마다 레몬향이 났다. 여름의 둥글게 솟은 이마와 끝이 적당히 둥그스름한 코와 날씬한 목선과 선명한 목젖이 드러났다. 탄산의 기포처럼 스르르 올라오는 청량한 느낌이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중에서

“나야? 정말 날 그려준 거야? 정말 기분 좋다. 네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이 그림 완전 마음에 들어.” “그만 돌려줘” 한나는 말을 할 때 가늘게 떨리는 자기 목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 목소리 이런 거였구나.” 여름이 살짝 웃었다. 비웃는 것 같았다. 한나가 여름의 손에 있는 스케치 노트를 확 잡아챘을 때 갑자기 여름이 비명을 지르며 코를 감쌌다. 책상 위에 있던 목탄 케이스 뚜껑이 열려 목탄들이 여기저기로 튕겨져 나갔다. 그때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름을 찾던 무리들이 눈앞에 벌어져 있는 상황에 만들어내는 소리는 전기주전자 물 끓는 소리 같았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중에서

책에 씌어 있는 말이었다. 동성을 좋아하는 감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는 지침이 있었다. 처음 여름이 상담을 해왔을 때 소영은 적잖이 당황해 여름의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수학 선생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었다. 지난 방학 동안 공부를 한 소영은 해줄 말이 생겼다. “다요. 안 좋은 걸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 좋네. 너 정말 행복해 보여.” “그냥 잘 해주고 싶어요. 집에 가서도 자꾸 생각나고. 그 아일 생각하면 그냥 웃음만 나와요. 그 아이 목소리는 뭔가 그립게 만들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중에서

양털이 토기를 빙빙 돌리다 글자가 써져 있는 곳이 나오자 멈췄다. “쌤이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있어.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 엄청 두렵다는 걸 말이야. 그걸 전혀 몰랐어. 그렇게 상처받을 줄도 몰랐고.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그리워해본 적이 없거든. 누군가를 원했던 적이 없거든. 그 마음도 몰랐고 내 마음도 몰랐어. 내가 왜 그런지 말이야. 이제야 알게 되었어. 여름이가 너를 이야기할 때, 너를 향한 마음을 이야기할 때. 그때 그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었겠구나. 나는 이래서 또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중에서

옹관 안에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인골 두 구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둘이 나누는 이야기는 이미 내가 되어버린 너의 이야기로 시작과 끝이 한 몸이 된, 여전히 끝이자 시작인 이야기일 것 같았다. 여름과 한나는 그렇게 느꼈다. “연인이라는 말인가요?” 여름이 물었다. “고고학적 사실을 말하는 거야. 해석은 각자 알아서들.” 연구원이 말했다. 한나는 생각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들은 이런 모습일 거라고.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중에서

옆 작업대에는 흙으로 빚은 토기와 동물 모양이나 사람 모양 토우들이 건조되어 가고 있었다. 벽 역시 비어 있지는 않았다. 여러 개의 가죽 화살 통에 깃털이 달린 나무 화살이 담겨 걸려 있었고, 나무를 구부려 만든 활 역시 여러 개 걸려 있었다. 바닥에 있는 나뭇가지 묶음이 이것들의 재료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이 작업대 하나에 멈췄다. 눈에 익은 모습의 골분함이었다. 수목원의 것과 모양은 같았지만 더 짙은 황토색이었다. 수목원에 납품하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띈 건 한쪽 벽면에 걸린 대형 사진이었다. 머리에 붉은 색 꽃을 달고,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색 상의와 화려한 러플이 달린 무지개색 스커트, 짙은 화장을 한 남자. 격렬한 춤의 마지막이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중에서

“응애 여사님도 누굴 좋아한다고요? 늙으셨잖아요.” 내가 놀라 물었다. 나이 든 사람이 사랑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늙은이도 사럼이여. 주근 거 아니먼 그런 중헌 감정을 잊어불지는 않제. 또 모르제 죽는다고 끝날 성싶지도 않고 말이여이.” “그 의사 아저씨 좋아하신다고요?” “좋아는 하제만.”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어.” 스미 씨가 한숨을 내놓으며 말했다. “그럼 스미 씨도 그 아저씨 좋아해요?” “어떻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 “우잉! 뭔 말이여 지금. 근래에 들어본 말 중에 기중 가슴 무너지는 말인디. 이녘 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남헌티도 다 숭이 되는 거슨 아니덩만. 그래서 말인디, 내가 그 의사선생을 스미한테 양보할라고.” “의사 아저씨 마음은요?” “스미가 이쁘디야. 그 의사 선생 말이. 고것이 마음 아니것써이. 맴이 있어야, 이삐게 뵈는 벱이여.” 응애 여사의 사투리는 더 이상 해독 불가능하지 않다. 그냥 저절로 알아지는 것 같았다. 응애 여사 말대로 ‘처처불상’이면. 이제 101, 102, 103호에서는 비슷한 냄새가 난다. 냄새는 서로의 마음에 스민다.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중에서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엄마 얼굴이 까칠했다. 엄마는 피곤한지 옷도 벗지 않은 채 삼인용 소파에 길게 누웠다. “나이트 근무 아니었어? 어디 아파?” “아니.” “얼굴도 까칠한 거 같은데?” “나, 임신한 거 같아.” “설마 엄마의 우리 보검이가 출산 장려 홍보라도 맡았어? 그래서 마음으로라도 뭐 동참 이런 거 하려는 거지?” “아니. 장난 아니야. 임신했다고.” 엄마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대책 없는 웃음도 보였다. 엄마에게 임신은 그다지 나쁜 소식은 아닌 것 같았다. 맙소사!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우리들」중에서

“기둥은 지붕을 떠받치고 벽체를 지탱했겠지. 이건 벽선이라고 윤곽선 같은 거지. 간혹 끊기는 부분은 시간이 증발해버린 곳. 이미 사라진 곳일 수도 우리가 놓쳐버린 곳일 수도 있고. 집중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날아가버리거든. 발굴할 때 놓치면 영원히 놓치게 되는 거지.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이것뿐이겠니….” 정아 누나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그만두고 옆에 있던 파란색 물뿌리개를 들어 올려 화초에 물을 뿌리듯 땅 위로 뿌렸다. 물기를 머금은 땅은 색이 더 선명해졌다.

“이렇게 하면 흙의 차이점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지. 발굴을 하다 보면 인간의 삶에 대해 흙만큼 예민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인간만큼 끈질기게 흔적을 남기는 동물도 없고.”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정아 누나가 또 말했다. “먼 과거 사람들의 공간에 내가 있다는 것이 가끔은 너무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 어마어마한 시간차를 뛰어넘어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먹먹하기도 벅차오르기도 하거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중에서

예쁘네.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엉, 많이 예뻤고, 세상 행복해 보였어. …불안해하기도 했고. 혹시 아는 사람 눈에 띌까 봐. 겨우 이 사진 한 장 남겼어. 늘 불안하고 무섭고, 그런 시간을 보낸 거네. 나 너 질투했었어. 너만 바라보는 희준이 미웠어.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나는 희준이 나랑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어. 그냥 게이로 살아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약간은 다른 사람이더라고. 희준이는 여자였어. 여자로서 남자인 널 좋아하는 거였어. 너니까.

네 인형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았다. 흙을 Ⅱ-9, 혼패층 깊이로 깊숙이 파내려갔다. 새 모형 토기가 발굴된 곳과 같은 깊이여야 할 것 같았다. 인형과 새 모형 토기를 넣고 흙으로 덮었다. 너의 마음이 하늘에 닿기를, 영혼이 새처럼 자유로워지기를. 어떤 모습이어도 난 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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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아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을 통해 ‘사랑의 고고학’을 실천한다. 작가는 섬세한 언어의 솔질로 기억의 지층을 굴착해 사랑의 흔적을 발굴해내는 것이다. 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어린 나이에 주로 첫사랑의 형태로 파묻힌 이 사랑은 퀴어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낯설고 두렵고 들끓고 뜨겁고 위험하고 조심스럽다.

이 책에 담긴 청소년 퀴어 서사를 꿰뚫는 동사는 세 가지, ‘잃다, 파다, 스며들다’이다.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상실 이후를 살아간다. 「우리들의 우리들」의 은푸른하늘은 아빠가 없고,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의 서해림은 엄마가 세상을 떴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강희는 친구를 영원히 잃었고,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의 장한나는 언어를 빼앗겼다. 사랑과 상실의 결합은 에로스를 더 애타게 하지만, 투사할 대상을 잃은 주체의 우울도 똑같이 깊게 한다.

사랑과 상실의 정체를 해명해보려는 마음이 두 번째 운동, 기억의 흔적을 모으고 되새기고 파고드는 운동을 일으킨다. 겉면의 인간 안에 있는 속살의 인간을 이해해보려는 이 운동이야말로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진짜 모습은 내면의 빛이 반짝이는 영역에 있다는 것, 이 웅숭깊음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이는 어른이 된다.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기억의 지층을 파고들면서 ‘망각’에서 ‘발화’로, ‘침묵’에서 ‘대화’로, ‘죽음’에서 ‘불멸’로 움직여간다. 잃은 후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기에, 이 과정은 너무나 아프고 안타깝다.

상처를 핥아 위무하고 화자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스며드는 운동’이다. “냄새는 서로의 마음에 스미”고, ‘희’라는 이름은 “살갗에 스미는 느낌”이며, “옅은 어둠이 입김에 날리는 목탄처럼 부드럽게 흩어져 하늘에 스며”든다. 서로의 삶에 대해, 서로의 마음을 향해 스며드는 운동이야말로 사랑의 존재 형식이고, ‘홀로’를 ‘함께’로 만드는 마음의 진동이다. 엄마를 잃고 방황하는 소녀 서해림과 트랜스젠더로서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실험 고고학자 스미 씨, 광주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응애 여사가 세대를 가로질러 밥상 공동체를 이루는 「어리고 젊고 늙은 그녀들, 스미다」는 특히 감동적이다. “말하는 사럼은 진심이제만 듣는 사럼이 고것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해불먼 안 믿제. 애간장 타들어가도록 말해도 안 믿어. 그런 시상은 치가 떨린당께.” 이로써 광주의 서사가 퀴어의 서사가 만나 “우리들의 우리들”을 이루게 되었다.
- 장은수 (문학평론가,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어떤 소설은 이토록 반가울 수도 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은 십 대 게이, 레즈비언들의 사랑 이야기와 성 소수자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지하고, 그들과 연결되는 앨라이들의 다채로운 삶을 담고 있다. 비혼모를 중심으로 트렌스 여성, 십 대 이성애자와 게이가 대안 가족을 이루기도 하고, 십 대 자립 여성은 트렌스 여성, 독거노인과 자매애를 나누며, 같은 반의 레즈비언 커플을 응원하는 씩씩한 십 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나면 “사랑을(연대를) 말하는 사람들 표정은 다 닮아 있다”라는 문장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게 된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은 ‘사랑의 얼굴’이 특정한 성별, 성 정체성,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한다. 당신은 이 소설집을 통해 아마도 당신이,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어떤 모습인지를 떠올려보게 될 것이다. 가령,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지, 내 입술을 다른 입술에 포개는지, 나의 숨을 타인에게로 불어 넣는지, 그렇게 함께 호흡하는지. 그리고 그 모든 생각 끝에 당신은 그전보다 조금은 더 용기 있게 말하게 될 것이다. “진심(해하지 않는 마음)은 그냥 알아지는 것” 같다고. 누군가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보려는 성실함이 바로 ‘사랑의 태도’라고.
- 김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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