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찾는데, 구두통을 메고 평화시장을 오가다가 ‘시다 구함’ 광고를 보고, 헌 옷 기워 입고 목욕재계한 후 학생복 맞춤집 삼일사를 찾아간다.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이 어떤 곳이더냐, 악취 풍기는 청계천 천변에 무허가 판자촌들이 다닥다닥, 빈민들이 득실득실, 움막이건 가난뱅이건 지저분한 것들은 말끔히 덮어라! 썩든 말든 안 보이면 장땡, 호박 구덩이에 똥 묻듯이, 눈 가리고 아웅이라. 1959년에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가 1961년에 완공되어 3층 건물 평화시장이 들어섰으니, 연건평 7,400평, 피복 제조업자, 의류가게 수백 개가 닭장처럼 채워진다.
시다가 무엇이냐, 기술을 배우는 견습공이라. 말이 좋아 공원이지, 하기 힘든 궂은 일, 귀찮은 잔심부름, 도맡아서 하는 밑바닥 노동자라. 미싱사, 재단사를 모시고 실과 단추를 나르고, 하루 종일 뜨거운 다림질, 실밥 뜯고 옷감 펼치고, 어이, 시다! 출출하니 빵 사와라, 목마르다 물 떠와라, 이리 와라 저리 가라, 오라 가라, 오락가락, 다리가 넷으로도 모자라고, 손이 발이 되어 발발발발 기어 다녀도 툭하면 머리통 쥐어박히기 십상이네.
시다 첫 월급이 천오백 원, 일당으로 오십 원꼴이니, 하루 하숙비 백이십 원에도 모자라다. 아침 일찍 구두 닦고, 밤에는 껌을 팔아 시다 기술 배우자니 눈물겹고 허리 휜다. 고된 시다살이 중에도, 서울 어딘가에서 고생하실 어머니 만날 생각, 배가 고파 울고 있을 동생들 생각, 이를 물고 기술을 배우더라. 일찌감치 아버지 일을 도우며 배운 재봉 기술, 주인 눈에 쏙 들어 미싱 보조로 승진한 태일, 월급도 삼천 원에, 잔심부름 면제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이시백, 소리소설 〈전태일전〉」중에서
〈아니리〉
1970년 10월 6일, 삼동친목회는 노동청장에게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제출한바, 이튿날 시내 각 신문사 게시판을 오가며 기다리던 태일이가 석간신문 나오자마자 살펴본즉, 그날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것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두드리면 열린 것이라.
〈중중모리〉
태일이가 감격하여 바로 신문을 사서 들고
평화시장으로 달려간다.
“어허. 삼동 동지들아, 어서 나와 신문 보라.
골방서 하루 열여섯 시간, 어린 소녀 2만여 명 혹사.
거의가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어허, 삼동 동지들아, 어서 나와 신문 보라……”
삼동회원들 반기하여 바삐 신문을 읽어보더니만,
“신문을 더 사서 사람들에게 알리자.”
전당포로 달려가서 차고 있던 탱크시계를 맡겨놓고
대출 받은 돈으로 신문을 싸그리 사온다.
“평화시장 기사 특보.”
“신문이요 신문, 경향신문.”
“신문 한 장에 이십 원.”
“특보요, 평화시장 기사 특보요.”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까지
건물 층층이 돌아다니며 목이 터져라 외쳐대니
어떤 사람 돈을 내며,
“한 장 주시오. 내 신문 사서 읽어보긴 처음이요.”
또 어떤 사람은 백 원을 내며
“수고 많소. 이걸로 신문 더 갖다 팔으시오.”
신문 300부가 삽시간에 팔렸구나.
---「임진택, 창작판소리 〈판소리 전태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