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문화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번성하고 성장할 수 있는 양수를 제공했다. 이 문화를 페미니즘과 레즈비어니즘을 표방한 책방과 출판, 디스코 클럽, 아트 센터, 시 낭송회, 연극 공연, 클럽의 여성의 밤 행사, 여성 음악 행사, 빈집 점유 운동, 레즈비언 역사 그룹, 레즈비언 아카이브, 레즈비언학이 뒷받침했는데, 압도적으로 여성 전용이었다. 이런 시와 노래, 연극은 정치적 사상을 촉발했는데,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를 혐오하는 것에 관한 노래처럼 레즈비언 페미니즘에 기반한 경우가 많았으며 수천 명의 여성이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주었다. 여성 문화는 레즈비언이 안전하게 서로를 만나 영감을 받고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당시에는 별로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런 ‘여성 문화’에는 레즈비언이 지배적이었고 공통의 문화적 이해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성애자인 페미니스트들도 여성 문화에 참여했지만, 이들은 남성 주류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지원을 구할 수 있는 반면 참여할 수 있는 여성 문화 행사의 횟수에 제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들이 여성 문화에 푹 빠지는 데 남자친구나 남편이 걸림돌이 되었지만, 레즈비언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레즈비언 문화」중에서
1975년에 제정된 평등기회법에 따라 대중 이용 시설에서 여자만 받아들이는 것이 불법화되었다. 문제는 1984년에 런던의 ‘타락 천사’라는 술집에 관한 분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 게이 클럽의 주인이 화요일마다 여자들만의 밤을 열었는데, 이에 분노한 게이 남자들이 평등기회법 위반으로 업주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게이 남자들이 승소했고, 화요일마다 열리던 여자들만의 밤은 끝나 버렸다. 이후에는 레즈비언 클럽과 디스코들이 평등기회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멤버십 클럽으로 바꾸어 입장하는 여자들에게 회원증을 나눠주는 등의 위장을 해야 했다. 그러긴 했어도 이런 종류의 여성 전용 공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1990년대까지 살아남았다. 현재는 이런 여성 전용 클럽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트랜스여성’이라고 주장하는 크로스드레서 남자들이 자신들도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사회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한국 좌파 세력의 온정주의와 ‘형제애(兄弟愛)’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외국인 남성에게 충분히 발휘되었지만 같은 나라에 사는 여자들에게는 가차 없었다. 따라서 난민 사태는 성별 권력이 인종이나 민족 차이를 간단히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많은 여성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 사건이었다.
---「분리주의: 여자만의 공간과 조직」중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이성애가 생물학적으로 정해지거나 단순히 성적 지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남자 지배의 가장 근간이 되는 정치 제도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경계에 근거해 우리가 성적 이탈행위를 하는 소수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성애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으며 이성애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관행을 모두 문제 삼았다. 남류 사회학 이론에서 사회 제도는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행동 체계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회학자들은 가족이 이러한 ‘제도’의 가장 중요한 예라고 본다. 가족은 생물학적인 결과인 것이 아니라 특정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 조직으로 여겨진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 여성 억압이 구성되고 여자의 노동이 착취된다고 지적했다. 여성 폭력 대부분이 ‘가족’ 안에서 발생한다. 이동과 표현의 자유와 같은 여성 인권이 가장 제한될 수 있는 곳이 ‘가족’이다. 가족은 여성의 종속이 문화로 길들게 하는 도가니이다. 페미니스트 정치 이론가인 수전 몰러 오킨Susan Moller Okin은 가족이 아이들을 남자 지배의 권력 관계 안에 놓고 기르는, ‘(남자) 정의를 가르치는 학교’라고 설명한다. 사회학자 사이에서 가족은 반드시 정치적이거나 남성 권력의 장으로 여겨지진 않더라도 사회 제도의 하나라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성애 자체도 제도라는 생각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과 이성애」중에서
SM 운동이 레즈비언 페미니즘에 미친 효과는 처참했다. 페미 오티토주는 이로 인해서 ‘레즈비언의 힘’ 행진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운동이 당연히 평등에 관한 것이라고 여기고 스스로 평등 원칙에 기반해 성적 미래를 창조하리라 생각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깊은 실망과 비탄을 느꼈다. 시빌 그룬드버그는 “SM이 등장했다는 게 비통했다.”고 말한다. 그는 여자들이 SM 문제를 두고 양편으로 갈라지면서 우정과 네트워크가 망가지고 운동이 심각히 훼손되었다고 말한다. “SM은 사람들을 찢어 놓고 운동을 파괴했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여자들이 SM을 포용했고, 정말 재앙이었어요.” 샌드라 맥닐은 ‘사모아’의 사상과 문화가 영국에서 돌기 시작했을 때 나를 비롯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느낀 충격과 공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토할 것처럼 기분이 안 좋았어요. 즉각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죽음이구나. 우린 페미니스트들이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난 레즈비어니즘이 이성애와 달리 동등한 여성 사이의 섹슈얼리티라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거든요.” 그는 SM이 “우리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에 대한 남성 폭력 문제에 대해 하던 활동을 완전히 약화시켰다”고 말한다.
---「SM: 평등한 성 정치학에 대한 반동」중에서
“이제 여성 운동은 없어. 다음 운동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전 화가 나서 길길이 뛰었어요. 그때가 어제처럼 생생히 생각나요.
“정말 너무 우울했어요.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몇 년간 그랬어요. 왜냐하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역할 수행이나 이성애 규범과는 다른, 긍정적인 것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SM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채찍질이나 하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종말로 인한 영향은 감정적인 데서 그치지 않았다. 경제적 생존이 위협받는 예도 있었다. 린 한은 보수 정부가 런던 권역 의회를 폐지했던 1986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때 전 직장을 잃었어요. 제가 정치 활동을 하던 모든 단체가 점차 죽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는 퀴어 정치학이 등장하여 절망에 빠졌었다고 한다. “퀴어 정치학과 포르노를 받아들인 레즈비언들에게 패배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레즈비언들이 성 산업 문화와 상품을 받아들인 것은 특히 절망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90년대 초반에 클리솔드 공원에서 열린 축제에 친구랑 같이 갔었어요. 거기 레즈비언 부스가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온갖 딜도가 다 있었어요. 그냥 남자성기인 거나 마찬가지죠.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제 정말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게 레즈비어니즘이라면 정말 끝장 난 거구나.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정말 끔찍했어요.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종말」중에서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이 분출하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남자 크로스드레서들이 요구하는 수준과 영향력에 대해 여성들이 분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런 새로운 물결의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여자들이 자신의 레즈비어니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고 있다. 이 책을 위해 인터뷰를 수행한 당시에는 이런 현상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 참여자들을 지금 다시 인터뷰한다면 새로운 레즈비언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이 시작될 가능성에 대해 분명 다르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가 다르므로 우리가 1970년대에 만들어낸 운동과 똑같은 운동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새로운 세대의 레즈비언들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기보다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단계의 레즈비언 혁명을 위한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새로운 레즈비언 혁명을 향해」중에서